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사형 선고받은 여자 폭탄범 - 안경신
꽝! 새로 지은 청사의 바깥 벽과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이어 또 한 개의 폭탄이 평양 경찰서에 던져졌다. 불발. 1920년 8월 3일, 평안남도 경찰부 새 건물에 던져진 폭탄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체 이 폭탄은 누가 던졌을까. 안경신. 그녀가 바로 이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다. 일제가 여자 폭탄범이라고 혀를 내두르던 안경신은 그 출생이나 사생활이나 만년의 생애가 미궁 속에 묻혀 있는 채 그녀의 활약성 중 극히 일부분만이 기록에 남아 여걸의 편린을 짚어 보게 한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순천 태생이라기도 하고, 본적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 둔 예수교 신자라기도 하지만, 그녀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이었고, 1921년 현재 34세라는 기록이 있고 보면, 3.1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안경신의 나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 25∼26세가 아니라 32세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안경신은 일찍이 평양 여자 고등 보통 학교 기예과를 졸업하고 결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사유로 곧 홀몸이 된다. 안경신은 그녀의 고독한 나날과 팔자를 원망하면서 교회 일에 매달린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에다 자기 한 몸의 불행이 겹쳐서 그녀는 교회를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을 미워하는 감정이 남달랐던 그녀는 일제와 싸우려고 벌써부터 내심 칼을 갈고 있었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평양의 서문동에서 마침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서문동 거리는 군중으로 들끓었다. 안경신을 군중 속에 뛰어들어 선동 연설을 하였다. 그녀가 일제의 폭정과 무수한 백성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사실을 폭로하면서 만세를 부르자 흥분한 군중들이 이에 합세,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으로 안경신은 20일 동안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무렵 평안남북도를 중심으로 예수교의 여자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 애국 부인회의 지부를 결성하고 있었다. 안경신은 애국 부인회 강서 지회의 재무직을 맡았다.
그 이듬해 초여름의 일이었다. 애국 부인회 증산 지회에서 상해 임시 정부 연락원에게 자금을 전달한 것이 탐지되어 애국 부인회 연합 본부와 각 지회의 간부들이 일본 경찰에 쫒기게 되었다. 그 무렵 안경신은 홀몸이 된 지 13년 만에 이성과의 교제를 갖게 된다. 그녀의 상대는 장사꾼을 가장한 독립 운동가 김행일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상해에 거주하다가 마침 평양에 나와 있었다. 일본 관헌의 눈길을 피해 그들 두 사람은 밀회를 가졌다. "난 상해에 거주하는 동안 처자를 잃었소. 지금 홀몸인 내가 안 여사에게 구혼을 해도 욕이 되지 않는다면 내게로 와 주오, 서로 부부의 연을 맺어 봅시다." 김행일의 구혼에 소년 과수가 되어 오늘날까지 13년 동안 혼자 살아온 안경신의 가슴은 떨렸다. 안경신과 김행일은 장차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하고 깊은 인연을 맺었다. "검거의 손이 그대에게 뻗쳐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납시다." 김행일은 상해로 떠날 것을 권해 왔다. 이미 부부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행동을 함께 하여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갔다. 안경신은 그 곳에서 대한 청년단 연합회에 가입했다. 안병찬이 이끄는 단체에서 그녀는 많은 동지들을 알게 되었다. 만주 관전현 쓰양거우에서 광복군 총영의 총영장 오동전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만주와 상해의 독립 운동가들은 그 무렵 미국 의원단의 도양 시찰을 계기로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통과할 때 일대 거사를 일으켜 한국이 얼마나 간절하게 독립을 열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만주를 거쳐 상해에 닿은 안경신은 김행일과의 결혼 약속이 산산조각나는 바람에 한동안 실의 에 빠져 버린다. 김행일의 말로는 자기는 상해에서 처와 자식들을 잃어 혼잣몸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본처와 자식들이 엄연히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안경신은 낙심하여 돌아왔다. 김행일이 머물고 있는 상해에 더 눌러 있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그녀의 몸은 홀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속에는 핏덩이가 자라고 있었다. 재혼의 꿈에 부풀어 있던 안경신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의 속임수로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그 아픔을 이기는 길은 무슨 일에든 몸을 던져 몰입하는 일이었다. 광복군 총영의 오동진 영장은 마침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일본기관 파괴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문일민, 김영철, 박태열을 폭탄 대장으로 하고, 장덕진을 비롯한 네 사람과 안경신 등 일행 5명에게 국내로 들어가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무장 독립 단원들은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겨 가지고 길을 나섰다. 문일민은 평안도를 맡고, 박태열은 황해도를, 그리고 김영철은 서울에서 일을 터뜨릴 계획이었는데,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그들은 모두 변복을 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박은 왜놈의 차림새를 하였고, 문은 노동자로 변장한 뒤 장덕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숨어들었다. 당시 안경신의 몸에는 폭탄 심지가 숨겨져 있었다. 일행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행인의 눈을 피해 밤낮을 숨어서 산길을 타고 다니기란 그렇게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게다가 안경신은 일행 중에서 홀로 여자였고, 몸이 무서운 임부였다. 갖은 고초 끝에 안주까지 왔을 때 그들 무장 독립단은 안경신에게, "여기서부터는 왜놈 순사들의 수가 늘어날 게요. 우린 그자들을 만나면 싸워야 하니까 안 동지는 먼저 가시오."하고 먼저 가기를 권했다. 거기까지 오는 데에도 남자들이 심지어 안경신의 옷보따리까지 들어다 준 걸 생각하면 행동을 함께하는 것도 도리이겠으나, 자기가 끼어 있어서 일본 순사와 싸우는 데 지장이 된다면 또한 먼저 그 곳을 떠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안경신은 마침내 그들과 헤어져서 먼저 안주를 떠났다. 날이 저물자 그녀는 어파 정거장 부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 평양 보퉁문 밖에까지 오니까 비가 쏟아졌다. 비는 사정없이 퍼부었다. 보통개 개울물이 쏟아지는 폭우에 불어나서 도무지 건너갈 수가 없었다. 안경신은 하는 수 없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밝히고 이튿날 평양 보통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서 평양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안주의 무장 독립단은 예상대로 일본 순사와 맞닥뜨렸다. 미야모토 경부라는 자가 순사 한 명을 데리고 검문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철저하게 검색을 하는지 무기를 품에 지니고 있었던 독립 단원들은 당장 해치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때였다. 미야모토 경부는 다시금 무장 독립단에게 접근해 왔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권총을 뽑아 경부와 순사를 쏘아 넘어뜨렸다. 그 바람에 폭탄 한 개는 잘못하여 가까운 연못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감시망을 피해 평양 시내로 잠입한 무장 독립 단원 중 문일민은 숭현 여학교 석탄광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그 곳에서 이틀동안 은신하여 지하실 유리창에 비치는 햇볕으로 비에 젖은 폭탄심지를 말렸다. 마침 방학 기간이라 폭탄 심지를 말리는 문일민의 거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틀 동안 숭현 여학교 석탄광 속에 숨어 있을 때 소녀 권기옥은 참외를 사서 나르기도 하였고, 냉면 등 음식을 사서 나르기도 하였다. 8박 3일, 마침내 그들의 거사날은 저물었다. 장덕진, 문일민 등은 김예진, 김용구, 이춘성 등의 안내를 받아 평안남도 경찰부 신축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이 거사로 경찰부의 벽과 유리창이 박살나고 경관 2명이 폭사하는 등 일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이 터질 때 법수머리 근처에서 참외를 사 먹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밤을 참외밭 원두막에서 새우고 미리 약속한 대로 이튿날 새벽 기자능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안경신은 박태열을 만나 몸에 지니고 있던 폭탄심지를 건네주었다. 박태열과 안경신은 그 폭탄을 가지고 평양 경찰서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들은 일경의 눈길을 피해 평양 시내를 벗어났다. 대동군 추을 미면 이천리 김웅봉의 집으로 숨어든 그들은 숭실 중학교 학생 김효록이 날라다 주는 밥을 먹으면서 멀리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 관헌들은 평안남도 경찰부 건물과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독립 단원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김웅봉의 집에서도 오래 있지를 못하고 제각기 흩어져 있기로 하였다. 안경신은 남자 동지들과 헤어져 평양과 대동군 일원을 전전하다가 멀리 함흥으로, 원산으로 건너뛰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이이를 낳았다. 1921년 3월, 계속 안경신의 뒤를 추적하던 대동 경찰서원에 의하여 그녀는 체포되었다. 안경신은 젖먹이 어린 아기와 함께 경찰서의 썰렁한 마룻바닥에서 고문을 당해야 했고, 급기야 그녀는 평양 법원에 송치되어 재판을 받은 결과 한국 여자로 최초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안경신은 곧 복심 법원에 불복, 공소를 하였다. 때마침 상해 임시 정부로 무사히 건너간 문일민은 안경신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폭탄을 던진 사람은 여기 있다'는 내용의 행동 경로를 적어 평양 지방 법원으로 송달해 오기도 하였다. 안경신이 사형 언도를 받게 된 데에는 어제가 그녀 일행에게 밥을 날라다 준 적이 있는 숭실 중학교 학생 김효록의 증언이 치명적이었다.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을 때 여자가 끼었느냐, 끼지 않았느냐가 그녀를 죽이고 살리게 되었는데, 밥을 나르며 들은 얘기로는 안경신이 경찰서 폭파 사건 때 가담한 것으로 증언하여 결국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이다. 김효록의 할아버지는 자기 손자가 1심에서 안경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손자를 데리고 당시 평양의 주요 인물이던 조만식을 찾아갔다. 김효록의 증언이 안경신의 생사를 결정짓게 되었다고 판단한 노인은 조만식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사건의 전후를 설명한 노인은, "고당 선생, 이 사건에 관련된 남자들은 모두 몸을 피하고, 여자 한 사람만 남아서 사형을 구형받고 복심 법원에 상고중인데, 어떻게 해야 그 안경신 여사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만식이 말했다. "다음 공판에 댁의 손자가 다시 증언을 하게 되었더라 이런 말이오?" "예, 효록이의 말 한마디가 안 여사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게 되었으니 어찌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조만식은 선뜻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법정에 가서 이렇게 증언해라." "어떻게요?" "그 때 일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여자 목소리는 안 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증언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을 때 '여자 목소리가 났다'는 증언이 사형선고를 받게 된 핵심이었다면 '여자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는 증언으로 안경신의 운명은 바뀌어직도 몰랐다. 이 증언 내용은 김효록이 사건 현장에 있다가 들은 얘기가 아니라 무장 독립 단원들이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로 피신해 왔을 때 밥을 나르면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은 것이 골자였다.
1921년 11월 18일 오전 11시. 평양 복심 법원 2호 법정. 안경신은 다시금 보채는 아기를 달래며 증언을 듣고 있다. "증인은 작년 8월 초에 이천리 김응봉의 집에서 안경신에게 밥을 가져다 먹인 일이 있는가?" 김효록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저는 그 때 방학 중이어서 저하고 가까운 김창린 등 두 사람이와서 김응봉의 집에 온 사람들이 집에서 10여 보 떨어진 버드나무 아래에 있으니까 밥을 겨져다 주라고 하기에 그렇게 해 준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증인 심문은 급기야, "사건 현장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느냐?"하고 핵심으로 들어갔다. 글자 김효록은 지난번의 진술을 뒤엎고, "사건 현장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담당 검사는 화를 벌컥 냈다. "야! 너는 지난번 재판 때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위증을 하다니! 위증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검사는 김효록을 노려보았다. 이 학생이 틀림없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아 유도 심문을 해보기로 했다. "좋다, 증인은 평시에 누구를 존경하느냐?" 그러나 숭실 중학 4년생이던 김효록도 만만치는 않았다. "저는 시골 학생이 되어서 그런 건 잘 모릅니다."하고 딴청을 부렸다. 김효록의 거짓 증언으로 안경신은 사건의 공소 유지가 매우 어렵게 되어 감형 선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공판에서 징역 10년 언도에 미결 구류 180일을 통산했다. 그러나 김효록은 위증으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조만식의 기지가 안경신을 죽음에서 살려내고 그 대신 죄없는 애국 학생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셈이었다.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소년 김효록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고당 조만식 선생댁을 찾아갔다. 조만식은 소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 참 잘했구나. 사람 하나를 살려내였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 단지 죄없는 너를 감옥살이 시킨 내가 몹쓸 사람이 되었구나, 용서해 다오." 조만식의 사과의 말에 마침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김효록은 뒷날 학업을 닦아 고려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어린 아기와 함께 옥살이를 시작한 안경신은 만감이 서린 가운데 어두운 시절을 눈물과 한숨으로 메워 나갔다. 초혼에 실패한 안경신이 13년간 독수공방을 지키다 재혼의 꿈에 부풀어 사귀었던 남자는 그녀에게 아기 하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일본의 식민지로 모든 것을 빼앗겨야 했던 시절에 그녀 자신도 조국의 운명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야 했다. 안경신은 감옥에서 나온 뒤 그녀의 이름을 초야에 묻고 숨어 살기로 하였다.
1920년대 초반, '여자 폭탄범'이란 너울을 쓰고 사회의 이목을 한몸에 받았던 안경신의 말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어느 가난한 농부에게 몸을 맡겨 살아가고 있다는 소문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1962년 3.1절 날 안경신에게 정부가 주는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나 그 훈장을 받을 사람도, 받아서 전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