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정신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나타난 것은 일체의 의복이며 표상에 불과하다. 표상을 본체인 것처럼 망상할 때 인류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고 역설하며 영국사회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사람이 바로 토마스 카알라일이다. 그는 서른 여섯 살이 되는 어느 여름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며 그것을 후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네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왜 비겁하게 줄곧 울고 콧물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걷고 있느냐. 덜된 인생아, 네 앞에 놓여진 최악의 경우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이냐?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리고 지옥의 고통이나 악마의 고문이 너에게 할 수 있는 전부이겠지, 그런데 너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라. 네가 비록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너는 그래고 자유의 아들이 아니냐. 지옥불이 너를 태워 버리기 전에 너는 네 발을 들어 지옥불을 짓밟아 버릴 수는 없단 말이냐? 무엇이나 올 테면 오너라. 부딪쳐 보자구나. 그것이 지옥이건 악마건 맞서 보자꾸나.
옷의 노예였던 인간이, 옷을 지배하는 인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적어 놓은 것이 그의 <의복철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의 지칭이었다. 카알라일은 몸과 마음을 훌훌 벗어 버린 자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생사와 유무에 끌려다니지 않는 자기를 붙잡게 되었다고 했다.
꺼져라, 거짓 희망의 그림자여, 나는 더 이상 너를 쫓을 생각은 없다. 나는 너를 이제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너희들 굶주린 공포의 유령들이여, 나는 너희와도 인연을 끊겠다. 너희들도 모두 그림자의 거짓이다. 자, 나는 이제부터 좀 쉬어야겠다. 여행에 지치고 삶에 지쳤다.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나는 이제는 자야겠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모두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카알라일을 읽다가 나는 소동파가 문득 생각났다. 왜냐하면 그의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아무 뜻도 없는 것 이라고 한 것이 소동파가 죽음 앞에서 한 이야기와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