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열녀도 부정녀도 아닌 여자 -을부의 아내
백제의 열녀는 개루왕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조를 지킨 도미의 아내로 대표되고, 신라 열녀는 왜국에 건너간 남편 박제상을 기다려 마침내 치술신모가 된 그의 아내로 대표된다. '열'이란 이처럼 지아비를 기다려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정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어떻게 보면 성을 한껏 즐기면서 열녀로 추앙받는 역설적인 열녀도 더러는 있다.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에는 을부와 병부로 불리는 절친한 초부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데 요 얼마 전에 맞아들인 을부의 아내는 어쩌자고 나무꾼의 아내답지 않게 천하 절색이었다. 을부와 병부는 매일같이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면서 입에 올리느니 그 미모의 아내 이야기였다. "짜아식, 언제 보아도 네 마누라는 참말로 선녀 같더라." 병부가 침을 튀기면서 꺼내는 말에 을부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시시덕거렸다. "헤헤. 참말로 내 마누라는 그만이여." "잠자리 맛도 그만이겠다, 응?"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네 같은 총각은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이. 아 고것이 백옥같이 흰 살결을 비비적거리면서 내 가슴팍을 파고들 때는, 어휴!" 병부가 침을 질질 흘러가며 을부의 바지춤이라도 잡을 듯이 바싹 다가서서 졸라대었으나 그 때마다 지난밤의 녹작지근한 순간순간을 돌이켜보느라 이야기를 더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병부는 친구 마누라를 머리 속에 떠올리느라고 나무를 하다 일쑤 손가락을 베기도 하고, 밤이면 밤마다 볼썽사납게 친구 마누라를 붙안고 몽설을 하기가 예사였다. 을부와 함께 산에 오르지 않는 날이면 먼발치에서라도 을부 마누라의 모습을 훔쳐보기 위하여 친구네 집 담장 밖에서 기웃거리기 일쑤였고, 별로 이렇다 할 볼일도 없는데 걸핏하면 무슨 핑계를 대어서 을부네 집에서 살기가 예사였다. "어이고 그저 저 을부 마누라를 더도 말고 하룻밤만 내 것으로 만들어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마는......" 병부는 날이 갈수록 을부 마누라를 사모하는 정이 더해 갔다. 이는 진정 큰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를 챌 만큼 병부가 친구의 아내를 흠모하는 정도는 지나쳐서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실로 엉뚱한 망상에 빠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 원수놈의 을부란 놈만 없어지면 저 마누라를 내 마누라로 만들어 버리고 말 터인데......" 마침내 병부의 마음에 살의가 움트기 시작했다. 며칠 뒤 구체적인 살해 계획이 마련되자 두 사람은 여느 날처럼 산에 올랐다. 미모의 친구 아내를 소유하고 싶은 외줄기 욕망 앞에 몇십 년래의 우정도 윤리도 아무소용이 없었다. 악마로 변한 병부는 아무 생각 없이 나무를 하고 잇는 친구 을부의 등뒤로 다가가 기어이 을부의 목을 베어 죽이고 시체를 벼랑아래로 굴려 버렸다. 을부가 마지막 죽어 갈 때 그의 입에서는 거품이 비죽비죽 비어져 나왔으나 병부로서는 그까짓게 문제될 게 없었다. 마을에 돌아온 병부는 을부가 낫질을 잘못하여 몸을 다친 데다가 발밑에 있는 돌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알렸다. 애초의 각본대로 친구의 장례까지 서둘러 치러 준 다음 병부는 늑대의 탈을 쓰고 을부 마누라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을부 아내는 당장 그 고운 손으로 땔나무며 고된 농사일까지 혼자 해내야 했다. "아주머니, 땔나무는 내가 해드릴 테니까 낫을 들고 산에 가는 일은 제발 그만두소." 병부는 일부러 호의를 가지고 바짝 접근했다. 무턱대고 그런 유의 호의를 받아들일 을부 아내도 아니었다. 문턱이 닳도록 뻔질나게 출입하는 병부에게 을부 아내는 제동을 걸고 나왔다. "놓아 두소, 동네에 소문날까 두려우니 저희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 좀 삼가 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랍디까? 나하고 함께 나무하러 갔다가 변을 당한 친구이니 불쌍하게 된 친구 아내 보살펴 주는 건 내 책임 아니오?" 이렇게 엉큼한 수작으로 맹리같이 접근해 오는 병부가 젊은 과부는 차츰 싫지가 않았다. 싫다기보다 나약한 여자 혼자의 힘으로 농사일을 거두랴, 나무를 하랴, 한 가정 일을 도맡아 보살펴 주는 병부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이 같은 낌새를 눈치챈 병부는 어느 날 밤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젊은 과부 혼자 거처하는 방으로 능구렁이처럼 스며들었다. "에그머니..... 누, 누구예....." "쉿! 나요, 병부." 어느결에 문고리에 안으로 걸어 잠그고 다가오는 병부의 가슴을 젊은 과부는 필사적으로 밀어내었다. 병부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마을에는 죽은 을부의 아내가 병부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마음 속으로 병부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소문이 날 대로 나 있는 터다. "임자도 그런 소문 들은 적 있소?" 병부는 마치 여러 날 만에 아내의 곁으로 돌아온 남편처럼 능청스럽게 옷을 벗으면서 여인에게 접근했다. "아니, 왜 자꾸 추근추근 기어 붙어요?" 여인은 기가 찬 듯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앉으며 앞가슴을 가렸다. "어허, 소문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렇고 그렇다고 나 버렸는데 왜 이러시오?" "난 소문이고 대문이고 들은 적 없어요!" "아따,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더라고, 그새 임자 남편 죽은 뒤로 독수공방 지키느라고 적적했지, 뭘 그러시오. 임자도 날 알고 보면 하룻만에 정이 쏘옥 들어 버리고 말걸!" 병부는 오늘 밤에 기어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하자면서 친구의 아내를 덥석 안아 버렸다. "이이가 왜 이러시오! 이이가 왜 이러시오!" 하면서 앞가슴을 가린 채 뒷걸음을 치던 여인은 이내 벽이 가로막아 더 물러서지 못하고 우람한 병부의 가슴에 안기고 말았다. 마을에 소문이야 어떻게 나 있건 실상 이 여인도 이 같은 밤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한 번 사내의 손길이 자기 몸에 닿자 제쪽에서 몸이 달아 능동적으로 남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요런 여우 같은.......' 병부는 연방 속으로 '계집이란 알 수 없는 요물이야.'하고 뇌까리면서 친구 마누라를 아주 녹여 없애 버릴 것처럼 점령해 들어갔다. 병부의 남성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여인은 폭풍우 같은 한순간이 지나자 다시금 사내 목을 휘어감고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날 어쩌자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소." "어쩌긴 뭘 어찌. 마누라 삼아 버리고 말 텐데." "맙소사. 당신 마누라 되는 건 기쁜 일이오만 행여 내 몸 먼저 빼앗아 먹고 마누라 삼았단 얘기는 하지 마소." "고게 무슨 발뺌이라던가?" "오늘 밤에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와서 재미봤다는 얘기는 쏙 빼고 당신이 정 이 몹쓸 년을 아내로 데려갈 양이면 매파를 놓아 정식으로 청혼을 하라 이런 말이오." "옳아, 그래야 임자가 정숙한 여자로 손가락질을 안 받는다 그런 말이렷다." 여인은 대꾸 대신 새삼스럽게 부끄러움이 고개를 드는지 사내의 땀에 젖은 가슴에다 얼굴을 묻었다. 이튿날 병부는 서둘러 매파를 놓아 정식 청혼을 하였다. 을부의 아내는 처음에 매파 말에 펄쩍 뛰며 수절할 것을 고집하다 못이기는 체하고 청혼에 응했다. 자기의 계획대로 미모의 친구 마누라를 아내로 맞아들인 병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얻은 것만큼이나 감격해 하였다. "임자가 내 아내가 되다니. 임자가 내 아내가 되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꿈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 진정 생시의 일이었다. "여보 마누라, 방으로 들어가세." 대낮에도 병부는 아내를 끼고 있을 양으로 부엌에서 일하는 아내를 불러들였다. "마누라, 우리 방아놀이 할까?" "방아놀이라니오?" "쿵덕쿵! 쿵덕쿵! 그 방아놀이 말일세." 아내는 그제야 병부의 말 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아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산에 가서 나무나 한 짐 해 오시지 않구 대낮에 무슨 방아놀이예요?" "아따, 평생 나무만 해 나르다 세월 다 보내란 말인가? 난 뭐니뭐니해도 그 방아놀이가 제일 좋더구먼." 그러면서 넌지시 아내 손을 끌어당겨 모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자 병부는, "임자, 내가 남편으로 보이는가, 남편의 친구로 보이는가?"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새삼스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내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새 남편을 돌아다 보았다. "글쎄,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내가 남편으로 보여, 남편의 친구로 보여?" "당신이야 제 남편 아니에요? 남편의 친구라니, 제가 아직도 죽은 전 남편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아세요?" "옳지, 말 잘 꺼냈다. 임자는 그전 남편 을부 생각을 아주 잊어버리고 사는가?" "잊어버리다마다요. 지금 즐겁게 해주는 이도 당신밖에 더 있어요?"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아내는 전 남편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같아 병부는 새로운 힘이 솟았다. '그러면 그렇지. 주야로 임자를 즐겁게 해 주는데 만에 하나라도 죽은 전 남편을 생각해서야 되나.'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병부는 아내 곁을 떠나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병부와 살을 섞고 살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여인은 첫 아들을 낳는다. 병부는 이제 이 여자가 자기 대를 이을 자식까지 낳았으니 전남편은 까맣게 잊어버렸겠거니 하고 안심한다. 그 다음해 아내는 또다시 딸을 낳는다. 연년생으로 낳은 자식이 아들 셋에 딸 둘, 5남매를 낳게 된다. 5남매의 부모가 된 병부와 그의 아내는 그 사이 살림이 늘 만큼 늘어 다복한 가정으로 이웃간에 부러움을 사게 된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병부는 마루에서 새끼를 꼬고 앉았다가 문득 처마에서 뜰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에 눈이 갔다. 얼마 동안을 낙숫물만 바라보고 있던 병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와 버렸다. "허허헛." 윗방 쪽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잇던 아내가 새끼를 꼬다 말고 웃는 남편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허허허, 허허헛." 아내는 무엇이 짚이는지 재빨리 바느질 손을 놓고 물었다. "여보, 무슨 생각이 나서 그렇게 웃으시우?" "엉? 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네." 남편은 서둘러 생각을 거둬 들이고 다시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내는 사이를 두지 않고 다그쳤다. "당신이 낙숫물을 보고 두 번씩이나 웃는 데에는 따로 까닭이 있어서 웃으셨을 거예요." "아, 아니래두. 그저 빗물이 떨어져서 빙그르르 돌아나가고, 돌아나가고 하는 꼴이 우스워서......" 병부는 딴전을 부렸으나 아내는 그냥 넘어가려 들지 않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이 낙숫물을 보고 웃으시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 그러셨을 거예요." ".........." "여보, 5남매까지 낳고 사는 우리 부부 사인데 말 못할 일이 뭐가 있나요? 말씀해 보세요, 여보." 딴엔 그랬다. 젊고 어여쁜 아내가 자기에게 온 뒤 자그만치 5남매를 낳고 살지 않는가? 그 하고많은 나날을 살아오는 동안 정이 붙을 대로 붙고 들 대로 들어 버린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인들 못하랴 싶었다. "여보......." "그래 알았소. 바로 임자 전 남편 을부 얘긴데......." "네, 제 전 남편이 혹 지난밤 꿈에 나타나기라도 했답니까?" 아내는 짐짓 짙은 호기심을 누르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꿈에 나타난 건 아니고 실은, 임자 전 남편 을부 녀석 말이야." "갑자기 왜 전 남편 얘기는 꺼내세요. 다 잊은 사람을....." "아니야. 재미가 있어서 그래." "재미라니오." 아내의 눈이 남편 몰래 빛난다. 남편 병부는 다시 한 번 허허허 웃고 나서, "그 녀석 내가 죽여 버렸거든." 하고 대수롭지 않게 뇌까렸다. "어머, 그랬어여? 어떻게요?" 아내는 애써 본심을 누르고 옛 이야기를 재촉하듯 되물었다. "그거 뭐, 어렵지 않더구먼. 나무하는 녀석의 등뒤로 다가가서 목을 쳐 죽이고는 벼랑 아래로 굴려 버렸으니까." "..........." "한데 녀석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입에 거품을 물고 죽었거든. 지금 저 뜰 아래 물거품을 보니까 그 때 녀석을 죽이던 일이 생각나서 웃었다네. 허허헛." "그래요? 낙숫물 떨어질 때 생기는 물거품을 보고 제 전 남편 죽이던 일이 생각나셨다구요?" "응, 허허헛." "에유, 그까짓 일이 뭐가 그리도 우스우세요?"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손에서 바느질감을 놓았다. 그녀는 이웃에라도 가듯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아내는 서둘러 관아로 달렸다. "사또! 살인자를 벌주소서. 사또마님!" 아내는 사또 앞에서 피눈물을 쏟아 놓았다. "살인자라니, 누가?" "지금 제 남편이 전날의 제 남편을 죽였소이다. 그자를 벌 주소서." 사또를 비롯한 육방 관속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의아해 하였다. "지금 남편이 전날의 남편을 죽이다니?" "예, 이는 사실이옵니다. 살인자가 눈치를 채고 도망가기 전에 어서 제 남편을 잡아 가두소서." 아내의 제보에 따라 그 남편은 관가로 잡혀 갔다. 심문 결고 병부가 을부를 죽였다는 실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 아내의 남편 병부는 사형을 선고 받고 죽어 갔다. 말하자면 전 남편은 현재의 남편에게 죽어 갔고, 현재 남편은 아내의 고발로 죽어 간 셈이었다. 아내는 남편 병부가 사형 언도를 받고 죽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미리 마련해 둔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죽어 갈 때 남달리 빼어난 자기의 자색을 미워했다. '내 아름다움이 두 남편을 죽게 하였으니 어찌 혼자 살아 남기를 바라겠는가.' 이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두고 열녀라 말하기도 하고, 부정녀라 말하기도 했다. 전 남편의 한을 풀어 준 점은 열녀였으나, 5남매까지 낳고 어차피 정을 쏟고 살을 섞으며 살아온 지금의 남편 병부를 살인죄로 죽게 하였으니 지어미로서 그보다 더한 불렬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정은 전 남편 을부에게 기울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던 것도 실은 이자가 전 남편을 죽였으리란 심증을 굳힌 나머지 그 확증을 잡기 위해 재혼한 셈이었으니, '열.불렬'의 열녀라기보다 끈질긴 '무서운 열녀'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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