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현해탄에 던져진 '사의 찬미' -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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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평양의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난 윤심덕은 역시 같은 해 태어난 전라도 장성 군수의 목포 감리를 지낸 전라도 갑부 김성규의 아들 김우진과 운명적인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윤심덕의 가문은 개화기의 평양 선각자들이 그렇듯 기독교를 신봉하는 집안이었다. 평양 남산현 교회 윤효병 권사를 아버지로, 전도 부인을 어머니로 하고 태어난 윤심덕은 위로 언니가 되는 심성이 있었고, 아래로 성덕과 기성 두 동생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전을 나온 성덕을 음악적인 재질 면에서 심덕과 비슷한 소양을 갖춘 형제였다. 심덕이 숭의 여학교에 다닐 땐 남달리 큰 키와 어여쁜 용모로 장난기 있는 남학생들의 유혹이 많았다. 위로 언니 하나는 멀리 안동으로 출가하여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부모들은 늙었고, 동생들은 어려서 그녀는 늙은 부모 대신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할 몸이었다. 첫 취직은 강원도 원주 공립 보통 학교 교사 자리였으나 그것은 잠시, 그녀는 얼마 뒤 조선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에 가서 동경 우에노 음악 학교 사범과에 유학, 숙원이던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우에노 음악 학겨 졸업 기념 공연은 윤심덕의 음악적인 재질을 크게 펼쳐 보였던 첫 무대였다. 이 공연을 본 제국 극장 경영주는 매달 150원의 출연료로 전속 계약을 맺자고 나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동경에서 사귄 애인 김우진을 따라 서울로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우진. 그는 일본 구마모토 현립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연극 학도이며, 유학생들의 연극 단체인 동우회를 조직하여 구갠 순회 공연에 힘쓰던 이물. 말하자면 신극 운동을 전개하던 촉망받던 극작가였다. 일본 동경에서 만난 윤심덕과 김우진의 관계는, 처음에 유망한 신진 여류 성악가와 젊고 유능한 극작가의 결합이라는 데에서 유학생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한편으로 지탄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것은 김우진이 이미 고향에 처자를 둔 기혼자라는 데에 있었다. 처자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윤심덕은 몸이 달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의 부나비가 되어 자기 몸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김우진을 그의 처자로부터 빼앗아 와야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둘러 귀국하고 만 것이다.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윤심덕은 의무적으로 학교에 근무해야 했다. 경성 사범 학교 음악 교사가 윤심덕의 두 번째 직장이 되었다. 그녀의 귀국은 기실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윤심덕은 목포 고향집에 내려가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워 보내면서 김우진과의 사랑의 이력을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지난번 목포 오빠하구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을 땐 참으로 꿈만 같았어......" 동경에서 유학중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는 회관건립 기금 모금을 위하여 하기 순회 연극단을 조직한 일이 있었다. 순회 공연을 통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연극 운동을 실천에 옮겨 보는 것과 아울러 고학생 구제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려 했었다. 공연 프로는 다채로웠다. 연극 이외에 음악도 곁들여졌다. 홍난파, 윤심덕, 한기주등의 독주와 독창이 있었고, 1920년 봄 동경 유학생들의 조직인 '극예술 협회' 맴버 외에 송경 학우회의 마해송과 그 밖의 몇 사람을 더 참가시켰는데, 전용이 쟁쟁했다. 그 때에 연출을 맡은 이가 김우진이었다. 김우진. '목포 오빠'로 통하던 김우진과 윤심덕은 동갑이어서 그랬는지 쉽게 밀착되었다. 그것은 몹시 수줍고 말이 없는 김우진과 쾌활하고 적극적인 윤심덕의 성격 차이에도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1921년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동우회 간부 임세희의 인솔로 일행 22명은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일행은 순연한 영업적 배우가 아니라 예술에 살고자 하는 신청년의 단체이므로 일행의 차림은 물론 화려치 아니하였다. 어디까지나 씩씩한 학교 정복을 입은 일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각한 인상을 받게 하였으며....... 1921 .07 .27. <동아일보>
부산서부터 제 1막을 공개하여 이르는 곳마다 끓는 듯한 대환영을 받고.... 1921 . 9. 30. <동아일보>
환영을 받고 지방 공연을 하면서 '목포 오빠'로 부르던 김우진과의 사랑을 점점 무르익어 갔다. 처음부터 시인이 되려고 습작에 열중했던 김우진은 그만큼 다감한 젊은이었다. 우리말과 일문으로 된 시 40여 편과 희곡 작품으로 희극 "정오", "산돼지". "이영녀" 등을 썼던 김우진은 '극예술 협회'와 '동우회' 순회 연극단의 지도자였다. 이러한 지도자를 애인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윤심덕으로서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애초에는 김우진이 이끌던 '동우회' 순회 공연에서 소프라노 가수로 찬조 출연했던 윤심덕이었으나 유교적 가정에서 조혼의 괴로움을 맛보며 살고 있던 김우진과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급기야 두 사람은 헤어날 수 없는 사랑의 가시 울타리로 얽혀 버리고 만 셈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국민 학교 교사 생활을 하고 있던 윤심덕이 목포 집에 묵고 있는 김우진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웠으나, 그 정열적인 윤심덕의 편지는 번번이 중간에서 없어져 버린 채, 김우진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무렵 윤심덕은 평양집을 처분하여 서울 서대문정 1정목 73번지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서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언니와 동생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윤심덕은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보다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가정의 가장이어야 했고, 돈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음악회다, 레코드 취입이다, 방송 출연이다 하고 바삐 나돌았으나 그야말로 그깟 돈은 '새발의 피'였다. 사랑하는 김우진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끊어진 채 소식이 없었다. 돈이 필요한 윤심덕은 짜증이 났다. 미모의 여가수에게 중매가 없을 수 없었다. 함경도 출신의 김홍기가 접근해 왔다. 그러나 윤심덕은 그를 마다하고 돈이 있는 이용문과 가까워졌다. "돈이 있으면 이태리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겠지......." 그리고 동생들도 외국 유학을 보내야 한다. 돈, 돈. 동대문 갑부 이용문은 그녀의 그 같은 꿈을 실현시켜 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600원이라는 거금이 이용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소문은 윤심덕의 인기만큼 멀리 퍼져 나갔다. 윤심덕에게 이용문 외에 흥이다, 우다, 송이다, 하는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비난이 빗발쳤다. 일본 대학 문과 3학년에 재학중인 박점식이란 젊은이는 윤심덕을 짝사랑한 끝에 정신 이상이 되었다던가......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은 이제 그녀 뒤통수를 따라 다니는 악담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윤심덕은 교육계의 비난과 악단의 잡음을 피해 북만주 지방 선교사 배형식 목사의 도움을 받아 하얼빈으로 몸을 숨겼다. 목포 집에 눌러 있던 김우진이 윤심덕의 행방을 찾아나선 것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윤심덕이 하얼빈을 떠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하얼빈으로 찾아온 김우진은 그만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서울로 내려온 윤심덕의 뒤를 따라 김우진은 급히 서울로 달려왔다. 두 사람의 오랜만의 해후는 그들을 또다시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고 만다. 두 사람의 초동에 있는 어느 여관에 묵으면서 예술과 사랑의 재기를 꿈꾼다. 그것이 바로 '토월회' 가입이었다. 김우진의 권고로 토월회의 박승희에게 가입 편지를 띄우자 토월회에서는 즉각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토월회의 특별 대공연..... 작년 겨울에 지방 순회를 마치고 그후 휴연중에 있는 토월회에서는 금 6일 밤부터 황금정 광무대에서 대공연을 할 터이라는데 이번에는 특히 조선 악단에서 자못 그 명성이 높은 성악가 윤심덕 양이 새로이 가입해 가지고 밤마다 포부를 다해 출연할 터이라 하며 금번 예제는 미국 <띄 떠불유 코리스티>과 <노코 나온 모자> 1막과 <밤손님> 1막을 상연할 터이라는데 전보다도 모든 설비를 새로이 하였으며, 배우들의 기술도 더욱 연마되었으므로 매우 재미있으리라더라. --1926. 2. 6. <동아일보>
그러나 윤심덕의 토월회 무대는 연극적으로 실패였다. "동도"와 "카르멘"의 여주인공이 되어 노래를 불렀다는 게 그녀의 인기를 얼마만큼 유지시켜 준 셈이었다. 윤심덕은 '토월회'에서 다시 '백조회'로 얾겼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뒤이어 단성사 맞은편 수은동 60번지로 보금자리를 옮겼으나 초라한 두 사람의 살림은 찌들 대로 찌들어 급기야 일본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는 말이 적고 냉혈한이라 할만큼 이성적이요 감정을 억제하고 표시하지 않던 김우진은 이때부터 죽음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본의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윤심덕이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을 때 피아노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기로 하였다. 성덕은 언니 노래가 취입되면 곧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사의 찬미 독창: 윤심덕 반주: 유성덕 1.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되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2. 우는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갈 위에 춤추는 자로다 ........
오사카 오카하루 여관에 집을 푼 윤심덕과 성덕 자매는 닛토 레코드 회사 다우치와 교섭 끝에 10여 곡의 취입을 끝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윤심덕 자매는 그 길로 요코하마에 가서 이별을 가졌다.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성덕은 윤심덕이 1921년 귀국했을 때 이화여전을 나왔고, 뒷날 이전 끌리 클럽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 곁으로 달려갔다. 죽음. 그들의 만남에서 죽음은 비롯되었고, 사랑의 밀어에서 죽음은 구체화되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의 영원함이란 곧 죽음 그 자체였으므로 죽음을 피한 사랑이 영원이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죽음에 이르는 길. 아, 그 길인가. 그 길이란 곧 신파조의 연극 대사만은 아니었다. 아니, 죽음 이전에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밀월 여행이었다. "사의 찬미"등 10여 곡의 레코드 취입료는 말하자면 죽음행 열차와 배표를 사는 요금이 되었다. "목포 오빠..... 도쿄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안선을 따라가며 해수욕도 하고 온천도 즐겨요. 이 돈이 바닥날 때까지........" 윤심덕이 속삭이면, "조선으로 가는 배표는 사야잖아?" 하고 김우진은 부산행 배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배표! 그건 배표가 아니에요." "배표가 아니라고?" "우리가 저 세상으로 떠나는 데 필요하 여행비예요." "여행비......" 그들은 30세의 젊음을 즐기고, 뉘우치고, 방황하면서, 시모노세키에 닿았다. 1926년 9월 3일. 부산으로 떠나는 연락선 도쿠슈마루 선객 명부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2목정 173번지 윤수선. 배가 떠나는 시각은 11시.
"생각나?..... 서울 수은동 60번지 오전 사진관 뒷방에서 밥을 사먹던 일......." 김우진이 갑판 위에서 어둠 속의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진관 뒷방에서 그들은 윤심덕의 라디오 출연료와 노래 부른 사례비로 겨우 살았다. 8월 4일 새벽 4시. 죽음은 무릎 아래에까지 밀려와 있었다. 목포 갑부의 아들 김우진은 사진관 뒷방을 얻어 가지고 윤심덕이 벌어 온 돈으로 밥을 사먹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세상에도 그렇게 초라한 사진관 뒷방이 있을지 몰라. 우리 그런 방을 세 얻어서 한 천 년쯤 살아 보자." 어느새 한몸이 된 두 남녀는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다. 새롭게 열리는 두 사람만의 세계,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몸을 날렸다. "풍덩!" 하고 현해탄 검은 바다가 두 사람을 안아 들였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긴 돈은 총액 145원이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나이 30세. 두 사람의 정사는 신극사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보다 더 큰 메아리로 1920년 후반을 휩쓸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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