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과 초(楚)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자 한다면 오직 고조를 따라 제후를 평정할 때 항시 옆에 있었던 괴성(괴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38에 <부관.근흡.괴성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양릉후(陽陵侯) 부관(傅寬)은 위(魏)의 5대부(五大夫) 중의 하나인 기장(騎將)이었다. 패공을 따라 그의 가신(家臣)이 되었다. 횡양(橫陽: 河南省)에서 봉기하여 패공을 따라 안양(安陽).강리(江里:모두 山東省)를 공격해 개봉(開封: 河南省)에서 조분(趙賁)의 군대를깨뜨리고 곡우(曲遇).양무(陽武: 모두 河南省)에서 양웅(楊熊)을 쳐서 적의 수급 12개를 베었다. 그로 인해 경(卿)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패공을 따라 패상에 이르렀다. 패공이 한왕이 되자 부관은 봉지를 얻어 공덕군(共德君)이라는 호를 받았다.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가 우(右)기장이 되었다. 삼진을 평정할 때 세운 공로로 조음(조陰: 陝西省)을 식읍으로 받았다. 한왕을 따라 항우를 치고 회(懷) 땅에서 패공을 기다렸기 때문에 통덕후(通德侯)에 봉해졌다. 다시 패공을 쫓아 항관(項冠).주란(周蘭).용저(龍저)를 치고 오산(敖山:河南省)에서 적의 기장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식읍이 증봉되었다. 회음후 한신의 휘하에 소속되어 제나라 역(歷: 山東省) 근처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전해(田解)의 군대를 추격해 갔다. 상국 조참에게 소속되었을 때는 박(博: 山東省)을 공격해 식읍이 추가되었다. 제나라를 평정하는데 있어 그는 공을 많이 세웠기 때문에 부절을 나누어 받고 봉함을 받아 대대로 그 작위를 세습할 수 있었다. 양릉후에 봉함을 받을 즈음에는 그의 식읍이 무려 2천6백 호에 달했다. 그는 제나라 우승상이 되어 아직도 항복 안한 전횡 등의 역습에 대비했다. 5년이 지난 후 제나라 상국이 되었다. 4개월 후에 진희를 쳤다. 태위(太尉: 後日의 大司馬의 官) 주발에 소속되어 상국의 자격으로 승상 번쾌를 대신해 진희를 친 것이다. 이듬해 정월에 그는 대(代)의 상국으로 자리를 옮겨 변방 수비를 튼튼히 했다. 2년 후에는 상국이 승상으로 개칭되어 그는 승상이 되었다. 부관은 효혜제 5년에 죽었다. 시호를 경후(景侯)라 했다. 아들 경후(景侯) 부정(傅精)이 그를 계승해 24년 만에 죽었다. 그 아들 공후(共侯) 부측(傅측)이 작위를 계승해 12년 만에 죽었다. 그 아들 부언(傅偃)이 작위를 계승했는데 31년 뒤 회남왕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그는 죽고 봉국은 없어졌다.
신무후(信武侯) 근흡은 시종의 자격으로 패공을 추종해 완구(宛구:山東省)에서 봉기했다. 제양(濟陽)을 공격하고 이유(李由)의 군대를 격파했다. 근흡은 박현의 남쪽과 개봉의 동북쪽에서 진군을 공격하여 기병 1천을 사살하고 장수 한 명을 베었으며 수급 57개를 베고 73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로 인해 작위와 봉읍을 받아 임평후(臨平侯)라 호했다. 그는 또 남전(藍田: 陝西省)의 북방 전투에서 거사마(車司馬: 戰車司令) 한 명, 기장(騎將) 한 명, 수급 28개를 베고 57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가 패상에서 돌아왔을 때 패공은 한왕이 되어 근흡에게 건무후(建武侯)의 작위를 주었다. 기도위(騎都尉: 地方의 騎兵司令)로 승진되었다. 한왕을 따라 삼진을 평정했다. 서쪽으로 파견되어 농서(농西: 甘肅省)에서 장평(章平)의 군대를 깨뜨리고 6개의 현을 평정했다. 그 때 거사마와 사마후(司馬侯:기병척후사령)를 각각 네 명을 베고 기장 12명을 죽였다. 한왕을 따라 동진해 초를 쳤으나 팽성에서 오히려 패해 옹구(雍丘:河南省)로 물러나와 농성했다. 이 곳을 떠나 모반한 왕무(王武) 등을 치고 양(梁) 땅을 공략했다. 특수부대를 이끈 그는 치성(치城: 河南省)의 남쪽에서 형열(邢說)의 군대를 공격 대파시켰다. 그 때 도위 2명, 사마후 12명을 잡고, 사졸 4천1백80명에게 항복받고 관리 등도 수십 명 얻었다. 거기에다 형양의 동쪽에서 초군을 격파했다. 그로 인해 근흡은 3년만에 식읍 4천2백 호를 하사받았다.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하내(河內: 河南省, 黃河以北)로 가서 조나라 장수 비학(비학)의 군대를 조가(朝歌: 河南省)에서 깨뜨렸다. 기병장 2명과 수레와 말 2백50두를 획득했다. 한왕을 따라 극포(棘蒲: 河北省)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7개의 현을 함락시키고, 별군을 지휘해 조나라 장수 및 사마 2인 척후 4명을 잡고 관리와 사졸 2천4백 명을 항복받았다. 한왕을 따라 한단을 공격 항복시켰다. 별군을 이끌고 나가 평양(平陽: 河南省)을 함락시키고 적의 수상(守相)과 병수(兵守).군수(郡守) 등을 베었다. 그리고 업(업) 성을 항복받았다. 한왕을 따라 이번에는 조가.한단을 공격했다. 또한 따로 군사를 내어 조군을 격파하고 한단군의 6현을 항복시켰다. 회군하여 오창에 포진해 있다가 성고의 남쪽에서 항우군을 격파해 드디어 초군의 양도(糧道)를 차단했다. 근흡은 형양에서 군을 이끌고 양읍(襄邑: 河南省)으로 진군해 노성(魯城: 山東省 曲阜) 부근에서 항관(項冠)의 군대를 격파했다. 동진하여 증.담(繒.담: 山東省) 하비(下비: 江蘇省)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기(기).죽읍(竹邑: 모두 江蘇省)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또 제양 부근에서 항한(項悍)을 무찌르고 회군하여 진(陳:河南省)의 성 아래에서 항우를 격파했다. 별군을 이끌고 가서 강릉(江陵: 湖北省)을 평정하면서 주국(柱國:宰相).대사마(大司馬: 軍事長官) 등 8명을 항복시키고 강릉왕을 사로잡아 낙양으로 후송시켰다. 이런 승기로 인해 남군(南郡)이 평정되었다. 한왕을 따라 진(陳)에 이르러서는 초왕 한신을 생포하고, 이로 인해 할부를 갈라 대대로 세습이 허용되었다. 식읍 4천6백 호를 받고 신무후의 봉호를 받았다. 기도위의 직위로 한왕을 쫓아 대(代)국을 공격했다. 평성 부근에서 한신을 격파한 뒤 회군하여 동원(東垣: 河北省)에 포진했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어 양.조.제.연.초의 거기를 모두 통솔했다. 별군으로 반군 진희의 승상 후창(侯敞)을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곡역 성을 함락했다. 경포를 칠 때 공이 있어서 증봉되었으며 5천4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무려 적의 수급을 벤 것이 90개, 포로 132명, 벼라도로 군단을 격파한 것이 14개, 성읍을 항복받은 것이 59개, 군.국을 평정한 것이 각각 1개, 현은 23개, 왕.주국이 각각 1개씩, 봉록 2천4백석 이하 5백 석에 해당하는 관료 39명을 잡았다. 여태후 5년에 근흡이 죽으니 숙후(肅侯)라 했다. 아들 근정(근亭)이 작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21년이 지난 뒤 법에 정해진 것보다 백성을 지나치게 부역을 시킨 것이 죄가 되어 효문제 3년 후원(後元) 3년에 작위를 박탈당하고 봉국도 없어져 버렸다.
괴성후(괴成侯) 주설(周설)은 패 땅 사람이다. 유방을 따라 패 땅에서 봉기해 유방의 참승(參乘: 수레 오른쪽에 타서 기우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의 官)이 되었다. 유방을 따라 패상에도 갔었고 서진하여 촉.한에도 들어갔으며 돌아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에도 유방의 곁에 있었다. 지양(池陽: 陝西省)을 식읍으로 받았다. 동진하여서는 초군의 식량보급로를 차단하였고, 평음에서 황화를 건너 회음후 한신과 양국에서 합류할 때에도 유방을 따라 항상 함께 있었다. 초군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유동적일 경우에도 주설은 유방을 이반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방은 주설을 신무후(信武侯)에 봉하고 3천3백 호의 식읍을 주었다. 고조 12년이었다. 고조는 주설을 괴성후로 삼았다. 노쇠한 고조가 몸소 진희 정벌에 나서려 하자 주설은 울면서 간했다. "지난날 진나라 시황제가 천하를 공략해 통일할 때에도 친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아직까지도 친정하시려 하니 결국 수하에 부릴 만한 인간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까." 고조도 눈물이 핑 돌았다. 주설이 자기를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짐이 그대에게 어떤 상을 주랴. 그렇구나. 앞으로 주설은 궁전문을 들어서서 종종걸음쳐 달리지 않아도 되고 살인을 해도 사형 당하지 않는 특전을 주겠소." 주설은 효문제 5년에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정후(貞侯)라 시호했다. 그의 아들 주창(周昌)이 후의 작위를 대신했으나 죄를 짓고 그 봉국도 없어져 버렸다. 효경제 2년 설의 아들 주거(周居)를 봉해 작위를 계승케 했다. 원정(元鼎) 3년에 주거는 태상(太常: 祭祀官)이 되었으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봉국도 없어졌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양무후 부관과 신무후 근흡은 모두가 고관의 자리에 있었다. 고조를 쫓아 산동 땅에서 봉기해 항우를 치고 적장을 주살하고 군사를 격파하고 성읍을 함락시킨 것이 수십 건이다. 그러나 한번도 궁지에 빠지거나 치욕을 당한 일이 없다. 이것은 하늘이 준 행운일 것이다. 괴성후 주설은 마음가짐이 굳고 바른 탓으로 한번도 의심을 산 적이 없다. 고조가 친정하려 할 적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이 마치 상심한 사람처럼 하였다. 돈독하고 후덕한 군자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