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孀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 지기백, 수기흑, 위천하식,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지기영, 수기욕, 위천하곡. 위천하곡, 상덕내족, 복귀어박, 박산즉위기. 성인용지, 즉위관장, 고대제부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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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덟째 장
직역
그 수컷 됨을 알고, 그 암컷 됨을 지킨다면 하늘 아래의 계곡이 된다. 하늘 아래의 계곡이 되면, 덕이 항상 떠나지 아니하니,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그 밝음을 알고, 그 어둠을 지킨다면 하늘 아래의 모범이 된다. 하늘 아래 모범이 되면 덕이 항상 어긋나지 아니하니, 다시 가히(끝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 그 영예를 알고, 그 욕됨을 지킨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덕이 항상 이에 족하니, 다시 순박함으로 돌아간다. 통나무가 흩어져서 그릇이 되는 것이니, 성인은 그것(樸)을 사용하여 본 받음의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큰 다스림은 나누지 않는다.
해석
비어 있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상대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남자는 남자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여자의 속성이 있다. 여자는 여자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자의 속성이 있다. 라즈니쉬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을 모두 이어받는다. 즉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합일로 가능한 것이다. 이때 태어나는 개체는 이 둘 중에 하나의 속성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둘 다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더 구체화 성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컷으로 태어났으면 그 내면에는 암컷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암컷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신이 남자이면서 여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천하의 계곡, 바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남성됨을 알고 여성됨을 지킨다면 빔, 도, 근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단계 더 높여서 설명을 하면 자신이 빔이 되는 것이다.
흑백의 논리나 성격도 마찬가지이다. 순박함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래의 속성이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이 어린아이가 구분하고 나누는 것을 배우면서 그릇이 되어 간다. 그 순박함을 잘라 내어서 어린아이는 이제 학생이 된다. 그리고 회사원이 된다. 사회 속의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순박함을 가장 높이 친다. 가장 높은 자리에 둔다. 큰 제도는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비를 뿌릴 때 좋은 사람의 논이라도 더 많은 비를 뿌리지 않고, 나쁜 사람의 논이라고 비를 적게 주지 않는다. 그냥 비를 뿌릴 뿐이다. 그것이 樸이다. 이 樸을 본 받으라고 한 것이다.
자 이제 순박함으로 돌아가 보자. 그럼 어린아이가 제일 행복한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자가 된 나무를 다시 숲에다 심을 수 있을까. 우리는 노자가 이야기 한대로 살고 싶을 수도 있다. - 싫어도 상관은 없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희망은 없는가. 의자가 된 나무도 빔이다. 그대는 아직 늦지 않았다. 의자가 숲속의 살아 있는 나무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빔으로 돌아갈 수 는 있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은가. 수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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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수컷의 억셈과 능동적인 힘을 발휘할 줄 알면서도 암컷의 유순함과 겸허함을 지킨다면 모든 물줄기가 모여드는 계곡과 같이 천하의 인심은 그에게로 쏠리게 될 것이다. 천하의 물줄기가 모여드는 골짜기와 같이 된다면 덕은 언제나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는 젖먹이 상태로 되돌아 기게 될 것이다. 흰빛처럼 세상에 빛나는 존재가 될 길을 알면서도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은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천하의 모범이 된다면 덕은 언제나 그에게서 차질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무한한 도의 경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의 영예를 누릴 방도를 알면서도 참고 욕된 위치를 지킬 수 있다면 모든 물이 흘러드는 골짜기처럼 세상의 인심은 그에게로 귀속하게 될 것이다. 모든 물이 흘러드는 골짜기처럼 된다면 덕은 언제나 넉넉한 것이고, 아직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도의 꾸밈없는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갓 베어 낸 통나무가 다시 쪼개지고 다듬어지면 여러 가지의 기물이 나오는 것처럼 도의 상태가 표출되면 인재가 나오게 된다. 따라서 성인은 그들을 발탁하여 관리의 우두머리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다스릴 때 큰 원칙만을 지키고 자질구레하게 세분하지는 않는다.
주
식: 본보기, 모범. 특: 어긋나다, 차질이 생기다. 무극: 무한한 도의 궁극의 상태, 한없는 도의 시원의 상태. 이 단어는 훗날 주렴 계의 태극도 설에 수록되어 송대의 형이상학의 중요한 개념이 됨. 박: 산에서 갓 베어 낸 거친 통나무, 순수한 것. 여기서는 도를 상징함. 대제: 무위자연의 도에 따라 큰 원칙만을 지켜 백성들을 꾸밈이 없이 소박함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정치를 말함.
해
노자는 이 장에서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한 사람의 생활 태도를 암컷의 유순함, 골짜기의 겸허함, 젖먹이의 때묻지 않은 순진함, 갓 베어 낸 원목의 질박함 등으로 비유하여 기술하고 있다. 흰빛처럼 빛날 수 있으면서도 검은빛처럼 남의 눈에 발견되지 않은 자신을 고수할 수 있다면 세상의 본보기가 될 수 있고 유덕자의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도의 궁극적 본질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영예를 누릴 방안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남이 알아주지 않은 낮은 위치에서 청류와 탁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물줄기를 받아들이므로 그 유덕 함을 지키는 것이다. 노자가 즐겨 쓰는 박이란 단어는 산에서 갓 베어 낸 통나무를 말하며, 그것은 아직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 즉 도의 상징인 것이다. 그 통나무가 갈라지고 다듬어지면 우리가 일상 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멋진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 원리를 보다 구체적 일상 생활의 예와 결부시켜 설명한 말이기도 하다. 즉 때묻지 않은 원목이 그릇이 되는 것처럼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운 도의 본바탕이 구체화, 현상화된 것이 바로 덕인 것이다. 그러한 덕을 지닌 사람을 성인은 발탁하여 여러 관원의 으뜸으로 삼기도 한다. 성인은 세상을 다스림의 도에 있어 큰 원칙만을 지킬 뿐 잘게 나누지 않는다. 즉 무위자연의 도는 쫓으면 그만이지 번거로운 제도 행정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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