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내부의 핵폭발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태양을 벗어나 빛으로 지구까지 오는데 8분 19초가 걸린다. 즉, 우리는 약 8분 전의 태양을 보고 있는 셈이고 태양이 지금 폭발해도 8분 뒤에나 우린 알 수 있다. 그 태양을 지구가 돌고 지구를 달이 돈다. 누가 훼방을 놓지도 않고 수십억 년을 그렇게 돌고 있다. 밟을 땅이 없는 가스행성인 목성도 태양을 도는데, 지구로 날아 들어오는 유성들과 우주의 파편을 강한 중력으로 흡수하며 위성들과 돌고 있다. 그렇다고 지구가 목성을 숭배할 필요는 없다. 공전 궤도는 정해져 있고 마땅히 그렇게들 모든 행성은 잘 살아왔다. 만약에 목성이 지구에 관심을 두고 가까이 온다면 인류는 물론 지구도 사라진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말없이 살아간다.
지구의 인구는 2023년 7월 현재 80억 4만 명이 넘고 있다. 우주의 별들에 비교하면 먼지조차도 안 되는 숫자지만 공간 한계의 물리적 환경 내에서 아등바등 잘살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어떤 학자는 스스로 인구 조절을 하고 있다며 변하지 않는 진리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의 행복지수는 어떠한가. 과연 행복하게들 사는지 묻고 싶다. 왜 이리 자살인구가 증가하고 처절히 죽어가는 사람은 나날이 늘어갈까. 그것은 우주의 원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공전 궤도를 가지고 태어난다. 각자가 그 궤도를 돌고 있고 그 궤도를 침범하면 파멸 내지는 분쟁이 일게 된다. 마치 목성이 돌던 궤도를 접고 지구로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과다. 인류 역사에 지금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공전 궤도 침범이다. 내가 바라보는 한 사람의 궤도가 잘못되고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문제는 일어나며 침범할 때 둘 다 피해 보기 일쑤다. 틀린 궤도가 아니라 다른 궤도라고 인정하면 충돌할 필요도 없고 거리를 두고 서로 도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달이 왜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가를 생각해보라.
‘인간은 고쳐 못쓴다.’라는 말은 고치고자 하는 사람의 말이지 당사자가 한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자꾸 고치려 할까? 그 이유는 욕심에서 나온다.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나 세상이 내 눈에 만족해야만 하는 인간의 고질병이다. 조금이라도 고쳐지지 않으면 다시는 안 보거나 관심을 끊어버린다. 직업 때문인지 요즘 어르신들을 종종 본다. 100년을 한 길을 걸어 온 분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쳐볼 텐가? 그분들은 궤도를 정확히 잘 돌며 살았고 지금을 사는 인류에 이바지한 부분이 크다. 틀에 박힌 어르신을 공경하자는 말이 아니다. 험난했던 공전 궤도를 보고 내 궤도를 올바르게 걸어야 할 것이다.
궤도이탈은 두 글자를 남기게 되는데 그것은 ‘후회’다. 내 궤도를 잘 돌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궤도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 사람의 궤도를 수정하려 드는 행위는 파멸로 가는 길이다. 수도 없이 지켜봐도 한심할 때는 그 사람의 궤도를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품고 있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는 한 다름보다 틀림을 주장하게 된다. 현재 정치판에서의 여야의 싸움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이어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보더라도 뭔가 궤도이탈이 보이면 저항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피를 얼마든지 흘려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인간의 공전이다. 이것은 각자의 공전이 아니라 생명을 건 공동체의 공전이다. 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나보다 강한 놈이 오면 피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공전의 힘은 부당함에 대한 항거다. 그 항거로 공전을 유지 하며 원래 돌던 궤도를 지키려 한다. 민주주의 체제든 사회주의 체제든 생명이 지닌 존엄을 유지하려는 행위는 역사적으로 존중받아 왔다. 그러나 지금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존재가 사람보다 더 존중받고 AI를 장착한 IT 기계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 전화번호 열 개는 외웠지만 지금은 자기 전화번호도 잘 모르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기계는 생명에 대해 도전장을 냈고 우리는 도전받고 있다. 어떤 학자는 시대의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는 자연을 무시한 행위로 본다. 이 재판은 간단하다. 인간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화가가 그림을 일 년 만에 끝냈다. 길고 긴 창작의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AI가 하늘은 파란색이 좋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파랗게 다시 칠했더니 당선이 됐다. 이 그림의 원본은 뭔가? 작가가 원래 그렸던 것인가 아니면 AI의 명령으로 수정한 작품인가.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작품명을 짓기 전에 원본은 뭔가. 일부 강사들이 AI는 조언하는 수준이라 말하는데 웃을 수밖에 없다. 과연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창작은 인간의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이 조언을 어길 때 공전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AI의 참견을 막는 법안이 통과 됐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래미어워드’에서도 AI의 도움을 받은 곡은 참여 못 한다고 선언했다. EU에서도 같은 법안이 상정 중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궤도이탈을 본다. 그것을 보며 안도감도 이는 예도 있지만 불안함도 있다. 그 이탈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이 이탈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태어났다. 우리가 자연과 가까워져야 하는 이유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자연에서 왔고 궤도는 순리다. 80억 명이 넘어도 아니 100억 명이 넘어도 우리는 지닌 궤도의 이탈은 그만두어야 한다. 서로의 공전 궤도를 인정할 때 우리는 평화롭다. 혹자는 타고난 삶의 경로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지구가 달을 끌어들이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서로 공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공존의 자연스러움을 박해 해왔다. 같이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정복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약소국을 대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생명이 있든 없든 무관하다. 이 냉정함을 누가 방관했는가. 그것은 당신이다. 욕심에 절어있는 강대국을 바라보며 우상으로 여기는 당신의 비굴함이다. 같은 궤도를 돌고 있음을 파괴하고 자신의 궤도로 끌어들이려는 마음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글이다. 우리의 문자를 무시하고 영어로 노래하는 가수들이 해외 순위에서 우승하는 꼴을 보면 진정한 한류인지 묻고 싶다. 이것은 서로 다른 공전 궤도를 돌고 있음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습이다. 창피한 줄 알라. 그러나 그들은 그들만의 궤도를 간다. 10살의 소녀가 지난밤이 그립다고 노래하는 시대다. 부모의 궤도가 우습지 않은가? 10살 된 소녀가 왜 지난밤이 외로운가. 그걸 이용하는 방송국은 뭔가. 윤리 의식이 가져오는 병폐다.
우리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서로 다른 궤도를 도는데 잘 지내냐고 묻는다. 잘 돌고 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니 궤도를 수정하라 명한다. 수정하지 않으면 매몰차다. 가혹하리만큼 매몰차다. 지금의 인류는 수정의 달인들로 봐도 무관타. 왜 그를 수정하려 드는가. 그것은 상대를 인정하는 순간 내가 낮아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상대는 공전 궤도를 잘 도는데 당신은 훼방을 놓고 있는 셈이다. 인정하라 그의 공전 궤도를.
아무리 나보다 어려도 경험이 없어도 그는 그만의 궤도를 돈다. 만지면 안 된다. 손 보는 순간 당신을 보고 웃어도 혐오한다.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남의 궤도를 건드리는 순간 당신은 적이 된다. 그것이 본능이고 천성이다. 무지몽매하더라도 지켜보라. 충돌 없이 공전하라고?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이 실수하는 부분이다. 지금 세대는 당신이 살던 시대보다 지식의 습득이 10배는 빠르다. 버거울 정도로 지식을 흡수하고 있다. 후대의 공전 궤도를 수정하려 하는가? 지키고 싶은 궤도는 과연 무엇인가.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을 빼면 지금은 고구려시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에서 왔기에 자연스러움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르다. 이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우리는 평화롭다. 그들의 공전 궤도를 수정하려 들면 공멸이다. 인류의 비극은 서로 다른 궤도를 인정하지 않을 때 온다. 지금도 겪고 있지만 생각해볼 철학 아닌가? 나는 이것을 미래의 인류가 생각할 화두로 본다.
매일 지정된 새벽 시간에 출근하는 간호사들을 본다. 이들은 그들의 궤도를 돌고 있다. 힘든 일 접고 편안히 살자는 생각이 지배적인데 굳이 하는 이유는 뭘까? 80억 명이 넘게 살고 있는 이 지구 안에 인간은 각자의 궤도를 돈다. 해야만 하고, 하고 싶어서 하고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그 끝은 죽음이지만 사는 데까지 우리는 궤도를 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기면 불편하다. 각자의 삶 안에서 잘 돌고 있는 궤도를 수정하려 애쓰지 말자. 당신의 궤도는 잘 돌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인간의 공전은 존엄하며 누구나 건드려선 안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대 의식은 변하며 묘한 인간이 태어나 흐름을 변하게 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은 자연에 무엇이 더 가까운가를 따지는 일이다. 자연과 멀다면 반드시 배제해야 하는 것이 공전의 운명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우리 손으로 바꾸려 할 때 학살이 일어나고 생명은 죽어 나간다. 그 오묘함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스스로 어른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