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 권정생
북한땅 어디에서 난 쌀일까
평안도 어디쯤일까
큰우물골 연실이네 논에서 난 쌀일까
성근네 아바이가 일하는 협동농장이란 데서 난 쌀일까
'입쌀'이라고 찍힌 부대에
신기하게도 하얀 쌀이 담겨져 왔구나.
1984년 9월
큰물이 지나간 마을에
북쪽에서 구호물 쌀이 왔단다.
영애네도 한 부대
장식이네도 한 부대
그토록 멀고먼 북한에서
쌀아, 너희들이 어떻게 왔니?
가시철망 겹겹이 막혔다는데
총칼을 멘 군대가 지키고 있다던데
지뢰가 묻혀서 무섭다는데
사람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쌀
없으면 그 누구도 살아가지 못하는 쌀
금보다도 귀하고
은보다도 귀하고
피아노보다 텔레비보다
장관님보다
대통령보다
성경책보다 더 귀한 쌀.
그런데
동근이네는 그 쌀을
그토록 소중한 쌀을 먹지 않았단다.
할아버지를 끌고 가 죽인 공산당 나라에서 왔다고
동근이네는 쌀부대를 태질쳐 버렸단다.
그러나 하천둑 금옥이네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쌀부대를 껴안고 울었단다.
이북 고향에서 온 쌀이라고
고향의 바람을 쐬고
고향의 물을 마시고 자란 쌀이라고
금옥이네는 고향에 두고 온 할머니를 모시듯
쌀을 쓰다듬고 얼굴에 비비며 울었단다.
북한 어디쯤에서 자란 쌀일까
샘골 달수네 논에서 자란 쌀일까
하얗게 반짝이는
달수의 귀여운 얼굴 같은 쌀
남쪽 아이들이 그러듯이
샘골 달수네도
가을 벼논에서
- 후여!
- 후여!
참새를 쫓았겠지
여름 가뭄에 물이 말랐을 땐
양수기로 밤을 새워 물을 펐겠지.
못자리를 하고
볍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할 땐 온 마을이
아저씨 아주머니들 함께 떠들며
막걸리도 마시며 모를 심었겠지
한 포기 한 포기 모를 심었겠지.
그 쌀을
동근이네는 부대째
태질쳐 버렸단다.
- 원수놈의 쌀, 공산당의 쌀......
쌀아, 이 노릇을 어떻게 하니?
너는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쌀을 다만 농사꾼이 가꾸는 것
손마디가 굵고 얼굴이 검게 탄
우리들의 농사꾼이 가꾸는 것인데
농사꾼은 나라가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얼굴색이 달라도
말씨가 틀려도
농사꾼의 손은 한결같이 어질고 착한 것을.
동근이네 아버지 손에 태질쳐진 쌀아
어떻게 하면 좋지
너에겐 아무 죄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너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손발이 닳도록 빌면 되겠니?
너는 고난당하는 한국의 백성처럼
슬픈 시대에 태어나
억울하게 고통을 겪는구나.
태질쳐야 할 것은 네가 아닌데
가시철망을 헤치고
지뢰 묻힌 원한의 휴전선을
간신히
간신히 헤치고 온 너인데
쵀 너를 태질쳐야만 했겠니?
쌀아,
너는 알고 있을 게다.
진정 태질치고 욕하고 미워해야 할 것은
네가 아니라는 것을
휴전선을 만든 것도 네가 아니잖니
뭣이 민주주의고
뭣이 자유이겠니,
너를 가꿔 준
함경도 아저씨
황해도의 아주머니
샘골의 달수와
큰우물골의 연실이
투박한 사투리를 쓰는 성근네 아바이
그 착한 사람들이 가꿔 준 쌀인데,
누가 미워서 너를 태질치니?
무엇이 미워서 너를 태질치니?
동근이 할아버지를 죽인 건 쌀이 아닌데.
쌀아,
정말 미안하구나
너를 가꿔 준 성근네 아바이한테
너를 가꾸느라 애쓴 황해도 아주머니한테
샘골의 달수한테
큰우물골의 연실이한테 미안하구나.
쌀아,
너는 알아주겠지
너를 어루만지며 쓰다 듬으며
고향 사람들을 만난 듯 눈물짓는 이들
수재민이 아니어서
쌀을 얻지 못한 다른 이웃들이
- 한 되만 바꿔 주세요, 다른 쌀 한 말 드리겠어요
- 열 곱, 스무 곱 드릴 테니 북한쌀 바꿔주세요
그렇게 소중스레 너를 반겨 준 사람들을.
그러나 쌀아,
그 누구보다도
가장 불쌍한 사람은 역시
너를 밉다고 태지친 동근이네 아버지가 아니겠니?
그토록 피맺힌 원한을
죄없는 너에게 왜 앙갚음을 했을까.
누가 그들의 손을 난폭하게 만들었니?
누가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니?
쌀아,
너는 알겠지
알고 있겠지.
휴전선을 넘어
가시철망을 넘어
지뢰 묻힌 원한의 울타리를 헤치고 온 쌀아
쌀을 무엇이든 알고 있겠지.
이 슬픈 나라 백성들의 눈물을
그 눈물의 씨앗을
그 원한의 시작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쌀은 알겠지.
하얗게 반짝거리는
한줌 쌀 속에
평안도 샘골 마을 우리들의 동무
달수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