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맛있는 걸……벌써 달아나고 말다니. ……오직 약간의 음악, 발 구르는 소리, 콧노래― 소녀들이여, 따스하고 말없는 소녀들이여, 너희가 맛본 열매의 맛을 춤으로 추어라!
오렌지를 춤추어라. 누가 잊을 수 있으랴, 자기 내부로 익사하면서도 그 감미로움에 반항하는 열매를. 너희는 그것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값지게 너희들에게로 몸을 돌렸던 것.
오렌지를 춤추어라. 더욱 따사로운 풍경, 그것을 꺼내 던져라, 그 성숙한 풍경이 고향의 대기 속에서 빛나도록! 작열하는 열매여, 한 꺼풀씩
향기를 벗겨내라. 저 순결하고도 벗기를 원치 않는 껍질과 혈연을 맺어라! 행복한 열매를 채우고 있는 즙과.
- R.M릴케, 「두이노의 비가」, 청하출판사, 1998.
R.M릴케(1875-1927)
1875년 프라하에서 출생. 프라하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및 미술사를 수학하였다. 작품집으로 『인생과 노래』(1894), 『형상시집』(1902),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3) 등 시집과 기타 『말테의 수기』(1910),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1926년 장미가시에 찔려 급성 백혈병의 증세로 사망.
꽃이 가고, 열매가 도드라지는 계절입니다. 나무의 모든 것이고자 태양에 빨대를 대고 힘껏 빨고 있는 나뭇잎, 입들! 릴케의 말을 빌리자니 열매는 춤을 위하여 몸을 부풀려 무르익고 있군요. 우리가 과육의 성숙한 감미로움을 한 입 베어 물 때 열매의 건반이 튕겨지고 우리가 몸속으로 과육의 즙을 받을 때 열매의 악보가 완성되나니 바로 우리가 세계의 악기이자 음표입니다. 릴케는 조각가 로댕에게서 많은 시적영감을 얻었습니다. 조각가가 물체를 통하여 사물을 보여주듯 시인은 언어를 통하여 언어의 조형물을 보여주면서 우연적인 것, 일회성 너머 존재의 궁극의 형태를 시로 표현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전 55편의 연작시로 무한한 세계의 숨결 속에 ‘혈연’을 맺고 존재하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골목마다 리어카에 가득 쌓인 침묵의 교향악들이 어딘가로 춤추러 가길 기다리는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