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머리칼에 먹칠을 해도 사흘 후면 흰 터럭 다시 정수리를 뒤덮는 나이에 여직 책들을 들뜨게 하는가, 거북해하는 사전 들치며? 이젠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땐데.’
밤중에 깨어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미래를 향해 책을 읽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빨리 비워지고 헐거워진다. 날리는 꽃잎들의 헐거움, 어떻게 세상을 외우고 가겠는가? 나는 익힌 것을 낯설게 하려고 책을 읽는다.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지면 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이다.’
우주 뒤편은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일 것이다. 노란 꽃다지 땅바닥을 기어 숨은 곳까지 따라오던 공간일 것이다. 노곤한 봄날 술래잡기하다가 따라오지 말라고 꽃다지에게 손짓하며 졸다 문득 깨어 대체 예가 어디지? 두리번거릴 때 금칠(金漆)로 빛나는 세상에 아이들이 모이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손을 털고 일어서는 그 잠깐의 미련 없음과 청산(淸算). 이 세상 떠나는 날 우리는 가장 아름답게 손을 털고 일어서야 하리. 손 털고 가야할,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우주 뒤편이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라니 얼마나 친근한가. 양지바른 곳에 핀 꽃다지에게도 쉿!하고 홀로 숨어들던 장독대. 그 곳서 졸다 깨면 그러나 또 두리번거리게 될까. 낮꿈에 또 서러울까.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