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환한 뱃속에 스미는 시간 - 박유라 나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한 톨 밥알 비가 오고 있었고 오후 내내 산 밖으로 구름이 끓어 넘쳤다 유리창에 얇게 걸린 하늘은 비가 와서 다 지워졌다 가지에 피어오르던 새소리도 잠깐 지워진 것들이 흘러가는 쪽으로 알약 풀리는 듯 안개가 스민다 가을볕에 터져 달아났던 낟알처럼 먼 나라 흐린 창가에 서서 일렁이며 다가오는 저녁을 바라보고 있을 때 TV에서는 검객의 칼날이 지나가고 산허리가 잘린 채 지나가고 쓰윽, 지붕 위로 검은 날개가 스칠 동안 손톱만한 꽃잎들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온 저녁 누룩처럼 번지는 붉었던 기억 푸르던 기억 기어이 어둠이 흘러내린다 뒤란이 먼저 흐물흐물해지고 나는 빗소리와 섞여들어 천천히 소화되기 시작하는 한 톨 밥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