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1970 ̄ ), '벌레가 되었습니다' 전문
내 방이었습니다
구석에서 벽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천장 끝에서 끝까지
수십 개의 발로 기었습니다
다시 벽을 타고 아래로
바닥을 정신없이 기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다리를 가지고도
문을 찾을 수 없다니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 소리
아버지가 숨겨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시인의 마음은 벌레처럼 예민한 것 같다.
벌레의 눈으로 보면 사람의 작은 동작, 사소한 말 한 마디도 큰 폭력이 된다.
내 집, 내 방도 생명을 위협하는 지뢰밭이 된다.
벌레가 되어 보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너무 작고,
폭력으로부터 숨기에는 작은 몸도 너무 크다.
벌레에 달린 많은 발들이 다 자잘한 번민 같다.
마음대로 드나들 문이 없는 번민.
그 많은 다리들을 어찌 다 먹여 살릴까.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