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1950~ ) '내 그림자에게' 부분
이제 우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어둠과 어둠 속으로만 떠돌던 나를
그래도 절뚝거리며 따라와 주어서 고맙다 (중략)
이제 등에 진 짐은 다 버리고
신발도 지갑마저도 다 던져버리고
가볍게 길을 떠나라
그동안 너는 밥값도 내지 않고 내 밥을 먹었으나
이제 와서 내가 밥값은 받아서 무엇하겠니
굳이 눈물 흘릴 필요는 없다
뒤돌아서서 손 흔들지 말고
가라
인간이 사는 곳보다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어린 나뭇가지에서 어린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
햇빛 속을 걷다가 돌연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아니면서 또한 나의 일부인 영혼의 검은 형제. 그 낯선
얼굴을 길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그림자 속으로 나비 그림자가 팔랑, 날아들었다.
가난한 영혼 어디쯤 앉았다 다시 허공으로 날아간 나비 그림자.
내 몸에 길 하나가 뻥 뚫린 것 같았다.
나희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