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1949~ ) '송곳눈' 전문
내가 아는 환쟁이 영감은
그림 한장 그려달라고 하자
보는 앞에서
제 눈을 송곳으로 찌른 모양이야
보기 싫은 작자 영 보지 않겠다고
제 눈알을 파버린 셈이지
재미있는 것은 그 영감이 파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림은 그려왔다는 점이야
두눈을 뜨고 두루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쪽 눈만을 송곳처럼 뜨고 보는 편이
훨씬 참을 만했다는 거지
송곳 같은 눈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무엇을 그렸겠나
그려놓고 나선 찢고
그려놓고 나선 찢고
그림이란 그가 물 위에 써놓고 간 흔적일 뿐이지
물 위에 이름 뿌리고 간 그 영감
어느 바위틈에다 송곳눈을 박아 놓았을지도 모르지
조선시대 화가 최북(崔北)은 스스로 눈을 찔러 '한국의 고흐'라고도 불린다. 당대의 관습과 권위에 맞서 예술적 자존을 지키기 위해 그는 수많은 기행(奇行)을 남기며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 힘은 보이는 눈이 아니라 어둠에 삼켜진 눈인지 모른다. 송곳처럼 곤두선 눈이 다른 세상을 보았을 것이다.
나희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