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1946~ ) '봄밤 1' 전문
'봄밤'이라고 적자 씌어진 글자 밑으로
희미한 물줄기가 번져 올라왔다
찬 샘이 있었다
낡은 철조망을 걷어내고
몇 개의 나무벤치를 내다 놓는다
늙은 아카시아가
머리 위로 눈비처럼 꽃가루 흩뿌린다
그곳은 한때 맑은 저수지 자리였다
회색의 우중충한 건물 지하로 들어가자 입구가 닫히고
매립지 밑에서 꽉 찬 노래가 새어나온다
유수지의 꽃잎은 봄밤의 수문을 틀어막고
애인들은 밤새 말을 잊을 것이다
제 일몰 다 펴기에도
봄밤의 경계는 너무 짧다
캄캄한 뻘흙 속에서 그대가 잠시 쉬다 간다
'봄밤'이라고 말하는 순간 가슴에 서늘하게 고이는 이 물기는 무엇일까.
아득한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봄밤의 이 냄새는 또한 무엇일까. 다 잊었
다고 생각했는데, 매립지와도 같은 기억 밖으로 새어나오는 이 노래는
누구의 음성일까. '봄밤'이라는 말의 수로를 따라 그리운 나무그늘로
잠시 돌아가 앉는다. 아카시아 마른 꽃잎이 소리없이 떨어져 내리던 그 그늘로.
나희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