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니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중에서
김사인 (1955~ )
1955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와 고려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2년 동인지 『시와 경제』의 창간동인으로 참여하며 시쓰기를 시작했고,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가만히 좋아하는』이 있다.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1987)과 제50회 현대문학상(2005)을 받은 바 있으며,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김사인의 시적 관심은 화려하거나 크고 엄청난 것에 있지 않다. ‘쓰다 버린 개 한 마리’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 ‘노가다 이 아무개’ ‘신용카드 한 장 변변찮은 헌털뱅이’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 발가락’ 또는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는 ‘키 낮은 풀들’ 같은 것들이 그가 즐겨 노래하는 것들이다. 그의 시적 미덕은 이것들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데 있지는 않다. 삶의 큰 길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고 조금은 뒤처져 있는 이것들을 삶의 중심에 갖다 다시 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그의 시다. 말 한마디 보태거나 빼거나 바꿔놓을 수 없는 시적 섬세함도 그의 이 시적 관심을 돋을새긴다. 그의 시들은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아름다움 속에, 과연 시란 무엇인가라는, 오늘의 우리 시단을 향하여 던지는 매서운 질문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이 글은 신경림 시인이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발간에 부쳐 표지에 써주신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