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훌쩍 넘긴 나이에도 당신은 어스름에 집을 나서 출근부에 도장 찍습니다 이 나이에 꼬박꼬박 도장만 찍어도 기본급을 주는 일자리가 어디 있냐며 약상자 바리바리 싸들고 회사문을 나섭니다.
한때 계모임 했던 친구네 집 사돈에 팔촌까지 이미 한 순배 돌고 돌아 더는 갈 곳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에 침 발라 낡은 장부 뒤적입니다 고생 접고 편히 사시라 해도 성한 몸뚱어리 놨다 어디 쓰냐며 단호하게 손사래칩니다.
몇 상자 팔아야 남는 이문으로는 글쓴답시고 술담배에 절어 사는 자식놈, 키토산도 먹이고 가진 것 없는 시부모 만나 맞벌이하는 며느리, 하이폴렌도 먹이고 손주녀석, 비타칼슘도 먹이고
마음만 종종걸음일 뿐 마땅히 갈 데 없고 오라는 데는 더욱 없습니다 온종일 발품에도 허탕치고 해거름 등지고 집에 들어 뜨는 둥 마는 둥 저녁상 물리고 집채만한 은행빚 무게에 겨워 애벌레처럼 오그라든 채 잠자리에 드는 당신
- 시집 『바람의 목례』중에서
김수열 (1959~ )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어디에 선들 어떠랴』,『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산문집으로『김수열의 책읽기』,『섯마파람 부는 날이면』등이 있다.
김수열의 시는 참 따뜻하다.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처럼 마음을 녹인다. 그는 아픈 이야기도 편하게 한다. 눈물 나는 이야기도 담담하게 한다. 웃으며 읽다가 눈가에 눈물 어리게 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도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진솔하게 말한다. 목소리에 공연히 힘주지 않고 담백하게 말한다.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至人)은 평범하고, 참맛은 담백한 데 있다.”고 하는데 김수열의 시가 그렇다. 곰삭을 대로 곰삭은 삶에서 우러난 깊은 맛을 지닌 시들이다.
* 이 글은 도종환 시인이 김수열의 시집 『바람의 목례』 발간에 부쳐 표지에 써주신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