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때 곳집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윤제림(1959~ )
1959년 충북 제천 출생. 198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삼천리호 자전거』『미미의 집』『황천반점』『사랑을 놓치다』 등.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지명에 유의하자. 보은군 내속리와 명사산 돈황여관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 상거 삼만 리. 몇 번이고 윤회와 전생을 통해 ‘그대’를 만나려 하나 번번이 어긋나고 또 만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귀촉도’의 정한이 현대적으로 계승된 이 시편 속 불운한 사랑은 전혀 칙칙하거나 어둡지 않고 외려 밝고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세속의 그 흔한 남녀 감정을 초월한 데서 비롯된다. 평이한 어법 속에 깃든 깊은 사유가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