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떠난 후 바람 같은 날 소문 없이 꽃은 지더구나. 떨어진 꽃잎 분분히 가슴에 쌓이는구나. 풀 무성한 철둑길 무릎 사이 턱을 묻고 산 넘어가는 전봇대 헤아리는 날 군용 담요처럼 흐린 하늘, 혼자 사랑을 배워 외롭더구나.
김영현(1955~ )
1955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창작과 비평사의 『14인 소설집』에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고, 이후 1988년 시집『겨울바다』를 출간하면서 소설가와 시인의 길을 걷고 있다. 주요 소설집으로『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편으로『폭설』그리고 시집으로 『남해엽서』『그후, 일테면 후일담』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 실천문학사 대표 등으로 일하고 있다.
“상처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일찍이 천재시인 랭보는 그렇게 말했다던가. 인생은 감히 말하건대, 인간의 사랑이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상 위에 한 인간이 또 다른 한 인간을 만나 사랑이라는 것을 한다. 그 누구의 말처럼 전쟁처럼 다가온 사랑.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기에 매일매일 연락을 하고, 함께 술과 밥을 먹고, 그 사랑의 육체적 결실로 섹스라는 것도 한다. 허나 섹스가 사랑을 저 높은 곳까지 구원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못 잊힐 사랑은 때론 지문처럼 추억이라는 것을 남겨주기에 한적한 교외선 기차를 타고 낯선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그때 사랑에 빠진 그는 일산의 백마역 부근을 찾았는가보다. 허허로운 그 들녘길. 때마침 바람은 켜켜이 얼싸안은 채 불어왔으므로 서로는 외로웠다. 외로우니까 저 먼 하늘을 지붕 삼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긴 포옹을 나누고, 이내 부싯돌처럼 번뜩이는 성적 교감을 함께 했을 것이다. 단 한번 맛본 그 커다란 황홀은 그동안 지상에서 겪은 수많은 상처를 치유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날은 저물고 소리소문 없이 꽃이 지듯 그토록 영원할 것 같은 그 사랑도 떠나가고 말았고, 고통스런 현실은 다시금 옛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그 사내는 어느 날 언덕길 들녘을 다시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휘날리는 꽃숭어리처럼 달겨들던 별리의 아픔과 상처뿐인 날들의 낮과 밤. 온종일 해 저문 들길을 거닐다가 속절없이 기차에 올라타고 만 그 사내. 사랑을 잃어버린 사내는 무릎 사이로 턱을 괴고, 필경 그 막막함을 어쩌지 못한 채 괜시리 전봇대 숫자나 헤아렸던가.
사랑을 잃고 어디론가 길 떠나는 자의 심정을 이 시인은 ‘군용 담요처럼 흐린 하늘’ 이라고 썼다. 그리하여 단 한번 맺은 인연의 끈은 인생이란 길을 깨닫게 해준 지침이 되고 만다. 인간은 마침내 혼자라는 것, 홀로 태어났기에 홀로 떠나가야 하는 ‘단독자’ 라는 것. 소설가 김성동식 표현에 따르면 ‘독립프로덕션’ 의 외로움을 몸에 친친 휘감고 다시금 살아내야 한다는 것― 허나, 사랑했던 그 순간이 그나마 추억이 되었기에 바람 같은 날들을 보듬고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것. 혼자 사랑을 배웠고, 외로우니까 그는 다시 한 사랑을 찾아 길 떠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