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도종환 (1954~ )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 제1집에 「고두미 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1985년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간행 이후 『접시꽃 당신』 (1986),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1988),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 (1993), 『부드러운 직선』 (1998) 『슬픔의 뿌리』(2002) 간행.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음.
도종환 시인이 많이 아프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다. 또 많이 좋아졌다는 말도 풍문으로 들었다. 이미 오래 전에 산촌 오지마을에 자리를 잡았다는 시인을 찾아가보거나 전화라도 해볼까 내내 망설였으나, 이 시를 읽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했다’ 고 하니 나 또한 거들 말이 필요 없지 않은가. 도종환 시의 매력은 이처럼 쉽고 명쾌해서 좋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로 끝나는 이 시를 읽으며 비로소 ‘생명과 평화’ 가 무엇인지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거의 ‘일중독’ 에 빠질 정도로 ‘운동’에 온몸을 바쳤으니 도저히 아프지 않을 수 없었겠으나, 그 병으로 인하여 오히려 도종환 시인은 ‘산경’ 이 아니라 삶의 ‘진경’ 을 깨달은 것 같다. 이 시를 읽다보면 가까이, 아주 가까이 쾌남아의 도종환 시인이 환하게 웃으며 한 그루 나무처럼 강건하게 서 있는 것만 같다. 나도 그 옆에 아무 말 없이 쪼그려 앉고 싶다. “형님, 제발 아프지 마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