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허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먹기 싫은 심정에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같은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전윤호(1964~ )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1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첫 시집『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1995) ,『순수의 시대』(2001),『연애소설』(2005) 간행.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숱한 월급쟁이들이 죄도 없이 무더기로 무조건 잘려 나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화창한 아침 스스로 사직서를 내던지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거기다가 배가 고프더라도 지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을 돌아다니겠다니 멋있다. 배짱도 대단하다, 그런데 그렇게 사표를 던지면 던졌지, 마지막까지 굽실거리며 눈치를 보는 양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볶아댄 정이라느니, 뒤통수를 치진 말아달라는 등 나가면서도 통사정이니 말이다. 그렇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먹고 사는데 힘이 된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사직서를 쓰자. 화창한 아침에만 쓰지 말고 돌대가리 소리를 들은 날 회사 화장실에서도 쓰고 술 먹고 자다 깬 새벽에도 사직서를 쓰자.
11월 '이 아침의 시' 시 소개는 이상국 시인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이상국 시인의 촌평과 더불어 시의 향기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心象』 신인상으로 등단. 1985년 첫 시집 『동해별곡』 간행. 1989년 두번째 시집 『내일로 가는 소』와 『우리는 읍으로 간다』(1992)『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 등을 간행함. 백석문학상·민족예술상·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