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산문집으로 『나는 고독하다』, 『육체는 슬퍼라』 등.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수상.
아마도 시인은 지독하게 외롭고 괴로운 모양이다. 그래서는 미쳐버리고 싶은데, 그러나 미쳐지지도 않는 참혹한 지경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나는 “심장”을 진실의 다른 말로 읽거니와, 그 진실에 벌레가 생기고, 모든 것을 낡게 만드는 시간의 거미줄이 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진실이 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소통이 되지 않아 복장이 터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앞에 떨어지는 시인의 돌연한 명령형 외침이 문득 우리의 눈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강? 왜 하필 강인가. 온갖 생명을 길러내는, 그 ‘물’이 시간을 넘어 흘러가는 강을 가리키는 것인가. 시인은 그곳에서 진실의 상처를 치유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강가에서 “당신”과 “나”는 왜 화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여기서 시의 화자인 “나”를 ‘시’로 치환하여 읽고, “당신”을 시를 읽는 독자로 상정해 본다. 시에 의하면 그 둘은 모두 고통과 상처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시의 독자는 시를 향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의 사정은 그것을 받아내기에는 이미 한없이 무기력해진 “몰골”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인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만약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시’가 자신에게 내리는 쓰디쓴 분노가 아니겠는가. 상처의 치유가 이미 불가능해진 시. 「강」은 시집 『자명한 산책』의 첫 장을 열고 있다. 의미심장하게 읽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