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받지 말 것’ 이라고 쓴 딱지를 전화기에 붙여놓고 나는 부재중이었다. 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돌아왔을 때 오랜 잠에도 식지 않고 베개의 부드러움에 묻힌 턱뼈로만 존재했다. 어떤 소리도 분간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공기를 끄적이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마음은 풀리고 적막했다 적막하게 평화로웠다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닝닝닝 전화벨이 울렸다. 닝닝닝 전화벨 끊이지 않고 닝닝닝 다 됐니? 넘실거렸다. 나는 꽉 눈을 감았다. 닝닝닝 꽃이 피고 닝닝닝 바람 불고 닝닝닝 닝닝닝 누군가 내 다섯 모가지를 친친 감았다.
아주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산문집으로 『나는 고독하다』, 『육체는 슬퍼라』 등.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수상.
생각이 곧 시가 되는 시인들이 있다. 그 시인들에겐 뇌와 입술 사이의 거리가 무척이나 짧아 관념은 이미 소리의 날개를 달고 태어난다. 그리곤 쏜살같이 입술로 내달아 문자를 낚아채고 솟구치는 것이다. 이 부류의 시인에게는 비유와 상징이 곁들 여지가 없다. 아니 차라리 불필요한 것이다. 관념이 이미 시이니 어떤 수사학도 무익한 연장이리라. 황인숙은 그런 새호리기나 황조롱이와 같은 매과에 속하는 시인이다. (…) 황인숙에게는 욕망이면 그저 욕망일 뿐이고, 욕망에 딸린 부속물들은 욕망의 방출을 더디게 만드는 방해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아마도 시인은 뇌와 입술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짧은 존재로 진화해온 것일 게다. 그러니, 그 거리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욕망의 수로를 단축하려는 그의 욕망은 하나의 역사 속에 들어 있다. 그 거리를 난만한 비유들로 장식하려는 시적 상투성과의 싸움의 역사 말이다. 그것은 특히, 한국시 특유의 정서주의와의 싸움을 뜻한다.
* 이 글은 정과리 문학평론가가 황인숙 시인의 시집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발간에 부쳐 써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