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정호승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짧은 시간 동안』외 간행.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칼 권하는 사회다. 신문을 읽다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거리의 노숙자를 내려다보다가, 응급실 촌로의 궹한 눈망울을 바라보다가, 직장 상사의 등 뒤에서, 누군가 불쑥불쑥 권하는 칼 한 자루. 평생 나를 이끌고 온 욕망의 칼, 격정의 칼, 분노의 칼. 그러나 오늘 아침 나는 내 모든 생의 그런 아픔을 다시는 헤엄쳐 돌아올 수 없는 갈대숲 너머로 던져버린다. 좌절과 패배와 방관이 아니다. 더욱 날 사나운 비장의 무기를 챙기기 위해서다. 그것은 눈부신 햇살에 자꾸 자꾸 부드러워지는 희망과 미소의 비수.
한번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두 번 읽으면 그 뜻이 헤아려지고 세 번 읽으면 내 것이 되어버리는 시. 그게 정호승의 시다.
지난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누군가를 향한 칼을 갈고 있었다면 오늘 아침 그 칼을 한번 버려보자. 칼을 버린다고 칼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잠시 빼앗긴 욕망의 집에서 칼을 놓아주고 먼 훗날까지 반짝반짝 빛날 나를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