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등단. 주요 시집으로 『접시꽃당신』,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외. <민족예술상>, <신동엽 창작기금> 등 수상.
익히 알다시피 배추의 잎이나 무청을 말린 것을 <시래기>라고 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우리 한국인과 가장 친숙한 먹거리인 시래기가 겪어온 일생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어둔 땅을 뚫고 생을 출발하여, 흙먼지 폭우 등 온갖 신산했던 세월을 맞받아치며 살아온 그의 한생. 그리하여 자신의 푸르렀던 생을 마감하고서도 서리 맞고 눈 맞아가며, 타자를 위한 마지막 헌신의 노정을 치르고 있는 시래기의 일생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리하여 이 시인은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우리 주위에 시래기처럼 생의 겨울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이냐고. 서정시의 기본은 인간이 살아가는 창작주체의 현실에 대한 자기표현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창작주체의 세계관, 생활, 체험 등의 요소들이 시인의 작품 속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도종환 시인이 보여준 시적 특성은 자신의 삶 속에 밀어 올려진 언어들로 짜여진 순정의 세계이다. 회한과 절망과 비루한 생애 속에서 스스로 단련돼 가는 인간의 모습들이 그의 시속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전교조 해직교사로서 한때 투옥을 겪었고, 이후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조와 헌신의 삶에 매진해오다가 복직되었으나, 지금은 교단을 떠나 충청도 외진 산골에서 쇠잔해진 몸을 추스르고 있다는 도종환 시인의 삶이야말로 바로 <시래기>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시인이란 조물주와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재자라는 말이 있다. 또한 시인이란 우리가 무심히 놓쳐버린 이 세계의 진실을 새로이 발견해내고, 거기에 영원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임을 이 시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