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겁의 하늘을 뚫고서야 저승나라 근력(筋力)들을 만나뵐 수 있단 말이냐 몇 만 길 땅속을 파고들어야 원혼들의 객담이라도 들을 수 있단 말이냐
이윽고 녹을 씻는다 종가집 장손의 신실한 자지처럼
불을 얹고
박힌다 박힌다!
천승세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 1989년 『창작과비평』가을호로 시 등단. 시집으로 『몸굿』, 소설집으로 『황구의 비명』, 『포대령』, 『신궁』, 『혜자의 눈꽃』등. <만해문학상>, <성옥문화상>, <자유문학상> 등 수상.
작고 하찮은 것들, 버림받은 채 팽개쳐진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눈길이 절실할 때다. 유년시절, 시골 마당 한켠에서 빗물에 쓸려온 듯한 대못 하나가 찬 서리를 맞고서 흙바람 속에 아무렇게나 제 몸뚱이를 내맡긴 채 홀로 녹슬어가던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이 시를 쓴 시인의 체험도 그러했을까? 시인은 시적 화자인 대못과 혼연일체(渾然一體)되어 그 대못이 어둠 속에서 꿈꾸어 마지않는 새로운 삶의 역동을 발견해내고 있다. 캄캄한 한쪽 귀퉁이에 버려져 어딘가에 박히지 못하고 녹슬어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죄값 때문이라는 자기연민과 그 참회―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의 근력을 회복하여 저 몇 만 길 땅속에 박힌 원혼들의 사연을 귀담아 듣고자 기다리고 있는, 그 간절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못 하나의 흔적에서 몇 겁과 몇 만으로 통칭되는 윤회의 한 생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시선은 그러므로 통시적이며, 내밀한 생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하여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기다림은 깊을 대로 깊어서 기어이 때는 오고야 만 것이다. 자신의 몸 밖 상처를 씻어 버릴 바로 그날이…. 그는 종가집 장손의 신실한 자지처럼 곧추서서 불꽃처럼 뜨겁게 온몸을 디밀어 저 깊숙이로 박히고 있다. 자기 죄닦음과 자기 존재의 확인을 위해 어딘가로 <박힌다!>는 것. 여기서 우리는 성적 파워의 장엄한 오르가슴마저 보여주는 시적 긴장미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천승세 시인의 시에는 웅혼한 수컷의 숨결, 뜨거운 심장의 언어가 뜀뛰듯 살아있다. 이는 자기 삶을 육화시켜 시를 발효한 까닭이리라. 허나 환갑 진갑 다 지났건만, 늙마의 혼돈이 저리도 깊은 까닭은 무엇인가. 벌써 몇 년째 홀로 남도의 끝자락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가 가슴 속 천불을 훨훨 털고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다시금 박혀 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