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나이 불편한 몸보다 불편한 마음 때문이실까 끝내 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올해도 대추 밤 속살 달게 익고 산들 가득 구절초 마타리꽃 우거져 추석날이 이리 환한데 아버지 오시지 않은 제사상 앞에서 목이 메인다 이십육대 종손 말이 좋다 대학까지 나와서 제 밥줄 떼이고 마누라 밥줄에 매여 사는 못난 자식놈 차마 바라보기 민망스러워이실까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 아직 사람사는 격식 빤한데 생전에 자식에게 제사일까지 물려주어야 하는 당신의 섧게 늙은 나이 독새풀처럼 끈질긴 가난이 미워서이실까 생애 접는 늘그막까지 낯선 타향에서 명절 때마다 거꾸로 자식놈을 찾아와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치떨리신 것일까 설날에도 제사상 물리자마자 선길로 떠나셨던 아버지 끝내 오시지 않은 추석 제사상 앞에서 아버지 대신 술잔을 올리며 오만생각 어지러이 헝클리어 길고 긴 하룻날이 모질다 해직의 잘린 목을 누르며 찾아 드는 이 명절 오늘 추석밤도 문 걸어 잠그고 끝내 보름달 볼 수 없다
- 시집 『그곳인들 바람불지 않겠나』 중에서
오인태
196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991년 『녹두꽃』 3집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곳인들 바람불지 않겠나』, 『혼자 먹는 밥』, 『등뒤의 사랑』이 있다.
풍성한 명절 곳곳에 섞인, 슬픈 풍경은, 애써 찾지 않아도 쉽게 목격된다. 미학적 장치의 개입 없이 쓰여진 이 시는 진정성이 파낼 수 있는 감동의 중심으로 읽는 이를 이끌어간다. 추석이라는 배경에 부자의 불우가 겹쳐질 때, 타지의 빈 방에 앉은 무수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손금을 그 위에 포개고 만다. 이때 우리는 쓸쓸한 추석을 조장하는 아버지의 ‘기구한 운명’과 아들의 ‘잘린 목’에 대한 부연을 요청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부자를 에워싸고 있는 그래서 서로 가중하며 분배할 수밖에 없는 슬픔의 진원지가 바로 동시대의 분명한 현실임을 반사할 필요는 있다. 올 추석도 그렇게 왔으므로. 그리움 속에서 불러내야 했던 몇몇의 얼굴들. 그 가늠 못할 표정이 바퀴처럼 구르고 있을 세상의 접면에도 보름달은 발을 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