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음이 무겁게 생각되는 날 입술을 말린 바람 산등성이 넘어와 가을이 되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거대한 텍스트를 빛나는 갈대와 단풍잎 몇 장에 박아넣는다 녹슨 추녀 끝 풍경소리에 새겨넣는다 저편 산기슭에 몇 무더기 연기 승천하고 있다 서울은 어떻고 진주는 또 어떤가 한 계절 앞에 못 박혀 있는 이 장엄한 질서를 천황산에서도 조계산에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린 모두 연기고 단풍이란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범종소리 은은한 절 하나 있다는 것을!
- 시집 『민통선 망둥어 낚시』 중에서
이동재
1965년 인천 강화 교동도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문학과의식』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민통선 망둥어 낚시』, 『세상의 빈집』이 있다.
어떤 우연의 칼날이 ‘시간’의 몸통을 자른다면, ‘순간’이라 불리어질 풍경이 사진처럼 박혀 있을 것이다. 사실 모든 언어는 운명적으로 우연의 순간만을 보전하고 전달하며 받아안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이 시는 한자리에서 자아와 대상과 그 너머를 오래 바라본 자만이 찍을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을 꺼내놓고 있다. ‘장엄한 질서’를 못 박고 있는 ‘한 계절’! 날것 그대로의 텍스트 속에서 젊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가을은 말하고 있다. “우린 모두 연기고 단풍이란 것을.” 그리고 인화지 뒤편에 숨어 그 모두를 바라보는 절집 한 채가 은은한 눈동자로 세상의 소요를 고요로 녹이고 있다. 그 배경에 들고 싶은, 마음을 박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