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신용목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 재학 중이다.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 지음 / 문학과 지성사
‘무너진 그늘’ 즉 어두운 기억들을 거느린 화자는 ‘바람’이 지배하는 갈대의 들판을 횡단하고 있다. 그가 걸어가는 ‘노복들’은 한때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섰던 폐염전이다. 소금기를 머금은 탓인지 갈대의 저무는 모습은 ‘누추’하다. 이 들판의 지배자는 바람이다. ‘바람’은 존재에 내재해 있는 운동성을 환기시킨다. 그래서 ‘바람’은 일상의 정체(停滯)를 깨뜨리는 표표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시에서 ‘바람’은 ‘누추’의 내력까지 함축하는 삶의 세월과 그 아픔을 표상한다. 그리고 조갈 든 갈대의 모습은 그 자체로 훼손된 삶을 떠올려준다. 그래서 갈대의 들판은 하나의 가계(家系), 또는 누추한 삶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화자는 누추의 내력과 훼손된 존재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그 모두를 함축한다. ‘부러진 촉 끝’의 예각성은 화자의 젊은 시절 즉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들에 있었던 ‘謀議’의 꺾임을 날카롭게 시각화한다. 이러한 기억이 화자로 하여금 하늘로 솟구쳐오르는 새떼들조차 갈대들이 뱉어내는 ‘통증’처럼 보이게 한다. ‘부러진 촉 끝’과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는 화자의 좌절과 아버지의 ‘허리 꺾임’의 이미지들이지만, ‘낮달’에는 아버지에 대한 화자의 회한까지 서려 있다. 자신의 좌절이 아버지의 ‘허리 꺾임’을 초래했다는 자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뼈 속에 든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결단에 이를 수 밖에 없다.
* 이 글은 황광수 문학평론가가 신용목 시인의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발간에 부쳐 써주신 해설 ‘응시와 성찰’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