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신문의 사설처럼 어두워져 갔다 주점의 눈빛들이 빛나기 시작하고 구름은 저녁의 문턱에서 노을빛으로 취해갔다 바람은 한 떼의 행인들을 몰아 욕정의 문틈으로 쑤셔 넣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수한 욕망으로의 이동이라고 그날 저녁의 이상한 공기가 나의 등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술을 마시고 청춘을 탕진해도 온통 갈망으로 빛나는 가슴의 비밀, 거리 거리마다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세월의 화석이 되어갔다
그리고 세월은 막무가내로 나의 기억을 흔든다 검은 표지의 책, 나는 세월을 너무 오래 들고 다녔다 여행자의 가방은 이제 너무 낡아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흠칫 놀라곤 하지만 세월에 점령당한 나의 기억을 찾으러 둥그런 태양의 둘레를 빙빙 돌며 저녁의 나는 이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간판들은 화려하고도 허황하구나 기억의 처음에서 끝까지 아아, 나는 추억도 없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대
1965년 강원 정선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촛불의 미학> 외 6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단편들> 외.
박정대의 시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모티브는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에서 추억을 되새기는 모습이다. 왜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인가? 과거의 기억에 묶여 있는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도시적 현실의 공간에서 색 바랜 추억들을 고통스럽게 되살린다. 과거는 그 순수와 본래적 의미가 퇴색된 채 현재 속에 침전되어 있으며, 따라서 시인은 현재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 용해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박정대 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추억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 이 글은 오형엽 문학평론가가 박정대 시인의 시집 <단편들> 발간에 부쳐 써주신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