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변두리에서 내 또래 친구도 별로 없이 심심했던 내게, 전쟁의 공포로 어린 새 새끼처럼 놀라 떨고 있던 내게, 충남 논산군 채운면 화정리 외할아버지네 끝이 보이지 않던 호남평야의 초록빛 들판은 불안했던 내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져주었네. 할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광활했던 들판. 어두웠던 마음을 알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채워주었던 드높은 하늘, 뭉게구름, 반짝이던 나뭇잎들, 시뻘건 황토밭들, 그 붉은 흙 위에 어른어른 눈부셨던 빛 아지랑이들. 시골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들짐승처럼 싸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수년간 잘 다져진 경험들을 나는 해면처럼 맛있게 빨아들였네. 내 생애 가장 두렵고 어려웠던 피난 시절에 나는 가장 신나고 행복한 체험을 했었네. 햇빛과 바람 속에 마구 자라나는 들풀처럼 터질 듯 실하게 여물었다네, 나의 초록빛 유년 시절이.
양정자
1944년 서울 출생. 서울사대 영어교육과 졸업, 1990년 시집 <아내일기>를 펴내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아이들의 풀잎노래>, <가장 쓸쓸한 일>, <내가 읽은 삶>등이 있으며, 현재 성산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좋은 시에는 추억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추억이야말로 시에 아련하고도 끝 모를 깊이를 부여해주는 것이 아닌가. 해방을 전후한 세대가 공유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바탕으로 씌어진 이 시들은 그야말로 무기교가 기교임을 실감케 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말은, 양정자의 시가 그만큼 진솔하다는 뜻이기도 한데, 시인이 어린애 같은 천진함을 지니지 않고는 근접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사무사(思無邪)란 이를 두고 이름일까. 이 혼탁한 세상을 부대끼며 살아온 이순(耳順)의 시인이 그처럼 결 고운 심성을 어떻게 간직해올 수 있었을까. 실로 기이한 느낌마저 든다.
* 이 글은 정희성 시인께서 양정자 시인의 시집 <내가 읽은 삶> 발간에 부쳐 써주신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