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천양희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등이 있으며 소월시 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풍경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에 의해 얼마든지 굴절되기도 하고 축소, 과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객관 실재에 대한 실물 그대로의 미메시스란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따라서 풍경을 언어를 통해 드러낸다는 것은 이미 주체의 의식 무의식의 교호에 의한 굴절과 과장과 축소가 들어있게 마련인데 바로 그 자리에서 시는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주체의 경험과 계급과 성별과 지역과 시간의 총량과 삶의 시대적 환경과 유전적 형질까지도 그것 속에는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한 대상과 세계에 대해 전혀 다른 인식과 언어의 세계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풍경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 사실은 우리 내면 속의 그 무엇이 풍경을 매개로 발현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활과 리라>>의 저자 옥타비아 파스의 말이기도 하지만 낯설게 하기란 전혀 새로운 사물과 의미가 외부의 영역에서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숨어있는 그것들이 우연한 경험과 계기에 의해 밖으로 현현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종교에서의 신 체험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시 <직소포에 들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풍경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다. 폭포에서 시인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을 듣는다. 또 폭포에서 정상과 피안(정토), 수궁을 본다. 일찍이 김수영은 폭포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자유와 정의를 읽었다. 그런데 천양희 시인은 김수영과는 사뭇 다르게 폭포를 보고 듣는다. 그것은 내소사라는 절의 배경을 이룬 특수한 지형에서 연유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 시에서는 정치적 상상력 대신 불교적 사유가 심도 있게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풍경을 시적 주체는 그만의 독법으로 읽는데 성공하고 있다. 좋은 시는 읽으면서 전경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게 마련인데 이 시가 그렇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지다”니! 시안(詩眼)이 얼마나 밝기에 시인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그 환한 경지를 볼 수 있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