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 이었다
손택수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학과, 부산대 대학원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제2회 부산 작가상, 2003년 제9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으로『호랑이 발자국』(창비)이 있다.
이 짧은 서정시에는 결코 적지 않은 서사성이 내포되어 있다. 절절한 사연이 들어 있는 사부곡(思父哭)이다. 아버지란 존재는 우리 시사에서 언제나 부정과 극복의 대상이었다. 서정주는 시 <자화상>에서 “아비는 종이었다”라고 말했고, 80년대 이성복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 개라도 말 못해”라는 극단의 직설적 언표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드러낸 적이 있다. 물론 이 시행들을 우리는 가족사적 의미로 한정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성복의 시편의 경우 주의를 요한다. 그의 시에서 80년대의 군사 파시즘을 표상하는 기표 즉 시대적 상징의 의미로 ‘아버지’가 차용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우리 근 현대 시사에서 ‘아버지’란 완고한 기성의 이념 즉 남성 우월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표상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적 성향의 여성 시인들의 시편들에서 흔하게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의식도 이와 같은 텍스트 읽기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위 시는 다르다. 이 시는 이러한 문학사적 전통 위에 놓여 있지 않다. 이 시는 시인의 전기적 생애의 일단을 피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가슴 아픈 유년의 체험을 토로하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무관심은 시적 화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그러나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인 아버지와의 갈등은 극적 계기를 맞아 화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즉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시적 화자는 오해를 풀게 되고 아버지와의 불화의 원인이 다름 아닌 끝까지 피붙이에게만은 지키고 싶었던 아버지의 자존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체험적 진실에 힘입은 형상 미학이 보편적 감동에 이르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시의 울림에 적지 않게 기여한다는 것을 이 시는 충분히 웅변해주고 있다. 일반 서정시가 시제에 있어 현재 시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음에 반하여 이야기가 들어있는 서사적 서정 시편에서는 과거 시제를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