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뒷산에 누군가 가전제품을 버리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이 무려 열 대 가까이 버려졌다. 어떤 놈은 모로 처박히고 어떤 놈은 나무 둥치에 버젓이 걸터앉아 있기도 하다. 로뎅의 조각처럼,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처럼 그 놈들은 각기 무언가를 열심히 사유하고 있었다. 햇빛의 방향과 농도에 따라 끊임없이 수신된 이미지를 화면에 주사했다. 놀라운 일은 화면에 비추어진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죽은 듯 고요하다가 일순 생생한 바람이 떠오르면 함께 떨며 몸부림치는 풀잎과 나무들. 온 산에 가득한 텔레비전들이 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대식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숭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99년 <현대시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있다.
생각은 이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동물과 식물도 생각에 빠져들더니 텔레비전까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에 잠길 뿐만 아니라, “몸부림치는 풀잎과 나무들”을 통해 “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더 이상 생명 다한 사물이 아닙니다. 참 자재(自在)로운 존재들입니다. “어떤 놈은 모로 처박히고 어떤 놈은 나무 둥치에 버젓이 걸터앉아” 마치 광합성으로 생명 에너지를 얻는 식물들처럼 “햇빛의 방향과 농도에 따라 끊임없이 수신된 이미지를 화면에 주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화면에 비추어진 모든 것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듭니다. 단순히 자신만이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주변의 사물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함께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텔레비전은 이렇게 해서 사물과 소통하는 중요한 매개자가 됩니다. 버려진 텔레비전과 그 화면에 얼비치는 그림자를 보고 그려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죽은 사물이 살아나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집안에서도 삶의 중심처럼 자리잡은 텔레비전(거의 대부분 집안의 중심자리에 텔레비전이 놓여 있습니다.)인데, 버려져서도 이렇듯 생생하게 살아나 자연과의 소통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으스스합니다. 온산을 가득 채운 텔레비전이 제각기 떠들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괴기스럽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보면 <사유하는 텔레비전>은 문명의 맹점까지도 아주 적확하게 짚어주는 성취를 보이고 있습니다. 잠시 주의를 기울여 꺼진 텔레비전을 한번 바라다보십시오. 텔레비전에 사로잡힌 무표정한 사람 하나가 그 속에서 건너다보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