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속으로 들어온 고래 오장육부를 휘돌다 배불뚝이 복어 되어 바다로 빠져나간 뒤 나는 자꾸 휘청휘청 지구가 어지럽다 바다 위 쪽배가 가만 떠 있을 수 없듯 시간이 흐를수록 뒤틀리는 내장 뭔가 속을 채워야 하는 식욕의 꿈틀림으로 이마엔 식은땀이 맺힌다 눈밭 파헤쳐 마른 풀을 뜯다 죽어간 양의 위속에는 돌멩이만 가득 있었다는 몽골에서 들은 이야기처럼 내 위 속에는 지금 바닷물이 차고 있다 고래를 위해.
전성호 시인 프로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계간 『시평』에 「기관구를 엿보며」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늦깎이 시인으로 데뷔한 전성호의 「허기」는 존재론에 관한 사유의 힘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한 편의 시로써 전성호 시인의 시세계의 전모를 엿볼 수는 없을 터이지만, 뭐랄까 이 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존재에 관한 사유가 깃들어 있는 듯 보입니다. 아마도 몽골 기행에서 착상을 얻고 있는 이 시는 내 몸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부재하는 ‘고래’, 그 거대한 허기를 묘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고래’라는 이미지는 존재의 비밀을 밝히는 거대한 상징으로서의 의미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래’의 귀환을 위해 나의 내장에 채우는 바닷물이란 결국 끝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시적 이상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듭니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시행은 오히려 10-12행의 표현입니다. 즉 ‘돌멩이만 가득 있는 양의 위(胃) 속’의 이미지란 고통에 찬 삶과 죽음의 운명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다른 해석도 능히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허기를 ‘돌멩이가 있는 양의 위’란 이미지로 표현하는 시인의 착상은 재미있습니다. 이 시에서 아쉽다면 맨 마지막 행 “고래를 위해.”라는 시행은 사족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뒤틀리는 내장’이란 표현이 암시하듯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운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깨달음을 보여주려 했다면 맨 마지막 시행은 없어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왜 고래였을까요? 저 몽골 초원과 사막이 바다였던 시절을 회상하며 고래라는 심상을 동원했는지도 말이지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다른 텍스트들을 좀더 읽어보아야 해명될 수 있을 듯합니다. 요즘 시에서 소위 ‘몽골풍(風)’ 시편들이 적잖이 창작되고 있습니다. 최근엔 몽골시편이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었는가 하면, 몽골 정신의 핵심인 <몽골집사(集史)>(전3권) 중 1-2권이 번역·출간되었습니다. 이 몽골 시편들이 우리 시에 어떤 상상력의 연대를 보여줄지 자못 기대됩니다. 이, 문명의 허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