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 이덕규 시인 프로필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학』에「양수기」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가 있다
이 도저한 관능의 미학을 보라! 읽으면서 우리도 덩달아 온몸이 달아오르지 않는가!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절로 공자의 말씀 한 자락이 떠오른다. "즐겁되 음탕하지 않는다"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즐겁다. 그러나 결코 음탕하지 않다. 그렇다. 좋은 시란 바로 이런 경지를 보여줄 줄 알아야 한다. 일부긴 하지만 엽기적이고 공격적인것이 현대성을 현현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른 시작 태도가 아니다. 그것들은 즐겁되 음탕하기 때문이다. 사물과 시적 주체간의 상호 교감을 적절한 언어 선택과 배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이 시는 울림이 매우 크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상상력이 아니면 이런 미적 형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절실한 생활 경험이 감동의 일반화에 이르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아닐지라도 그것의 주요한 한 요소임은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제목을「어처구니」라고 다소 엉뚱하게 달았을까? 사물과 인간의 상호 소통과 교감이 성적인, 그것도 벌건 대낮에 아주 질퍽한 수준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 성립은 시적 주체의 사물에 대한 지극 정성과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념적 차원에서 보면 이는 일반 현실의 규범과 제도를 벗어난 전혀 엉뚱한 상상력이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에 해당되는 일이다. 그러나 시는 바로 이러한 엉뚱한 그리고 어처구니가 이루어지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