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시집 <<귀로 웃는 집>>
▶ 임영조 시인 프로필
1945년 충남 보령 출생.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 수상 및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바람이 남긴 은어』, 『갈대는 배후가 없다』, 『흔들리는 보리밭』, 『귀로 웃는 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시인의 모자』 등이 있음.
도꼬마리는 일명 '도깨비풀'이라 불리는 국화과의 일년초 풀로서 들이나 길가에 절로 나는데 줄기는 1미터 가량 곧게 자란다. 잎은 잎꼭지가 길고 넓은 삼각형이며, 여름에 노란 꽃이 핀다. 열매는 갈고리 모양의 가시가 있어 무엇에 닿으면 잘 달라붙는다. 한방에서는 '창이자 蒼耳子'라 하여 약재에 쓴다.
어릴 때 들판에서 노닐 때 고리똥 바지에 달라붙는 이 풀이 나는 징그럽게도 싫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나는 그들이 그렇게 무엇이든 제 몸에 닿는 것이면 달라붙는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그들의 지극한 생존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을 다녀가는 고리똥 바지며, 새의 깃털이며, 짐승의 아랫도리는 그들의 생의 운송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을 이동하며 번식한다. 또 그렇게 생의 영토를 확장시켜 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골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그 번식력 강한 풀들도 멸종됐는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가 없다. 농약 탓이다.
이미 고인이 되신 임영조 시인은 그러한 재래의 우리 토종 풀인 '도깨비 풀'을 시인자신의 아내로 비유하고 있다. 비유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사물 간의 유사성 혹은 차이성을 근거로 한 표현 방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인은 도깨비풀과 아내에게서 어떤 유사성을 본 것인가. 그것은 시행에도 암시되어 있듯 끈질긴 생명력 그리고 우연히 맺은 인연일망정 끝까지 변치 않는 믿음으로 해로해야 한다는 은근한 사랑의 과시가 아니겠는가.
일찌기 시인은 자연 사물에서 반짝이는 사유로서의 삶의 예지와 통찰을 읽어내는, 아주 귀하고 값진 장인적 기질을 보여왔는 바 이시도 그러한 성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