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 비행기가 하노이에 도착할 즈음 창문 밖 구름 아래로 위험한 지도가 편안한 산맥이 되고 은하수가 사람 냄새 물씬한 강이 되고 정겨운 마을이 되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 이런 곳에서 어떻게 반제국주의 100년 전쟁이...... 그것도 승리를......
그랬었는데 하노이발 비행기가 뜬다 오후 두시
듀앗이 준비한 전통 대잎 도시락은 실하지만 ‘통관이 될까. 검역을 할 수도 없고 말야.’ 도시락은 도시락이지만 나는 정치적, 이란 말이 아까워서 까먹지 못하고 여행배낭 속에 꽁꽁 쟁여놓으니 밀수꾼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이젠 알겠지. 정겨운 마을이 편안한 산맥이 되고 사람 냄새 물씬한 강이 위험한 지도가 되는 이륙하는 상공에서 정겨운 것은 얼마나 아픈 것인지 물씬한 것은 얼마나 슬픈 것인지. ...... 구름 위에는 길이 없고 구름 밑으로 어느새 서울의 야경은 보석 다발처럼 화려하고 화려한 것은 얼마나 죄많은 것인지.
▶ 김정환 시인 프로필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 1980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외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하나의 이인무와 세 개의 일인무』 『황색 예수전』 『회복기』 『해방 서시』 『해가 뜨다』 등과 소설 『파경과 광경』 『사랑의 생애』 등, 산문집 『발언집』, 문학평론집 『삶의 시, 해방의 문학』, 음악교양서 『클래식은 내 친구』 『내 영혼의 음악』, 역사교양서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한국사 오디세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