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에 이른 나이 탓일까. 고현학적 상상력으로 명명할 수 있는 김광규 시인의 시쓰기는 최근에 와서 느림의 미학에 대한 성찰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죽음에 관한 시편도 적지 않다. 그런데 죽음을 보는 시인의 태도는 나무의 열반과 시인의 실존이 겹쳐져 자못 도저한 바 있다. "살아 있는 모습으로 서서 죽는 나무"라니! 이 표현은 끝의 3행과 맞물려 생생한 울림을 자아낸다. 그러니까 "[존재의――필자주] 뿌리가 없어/쓰러져 죽는 무리들" 속에는 시적 화자가 의당 포함되지 않겠는가. 예의 표현은 죽음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실존 풍경을 엿보게 하는 비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시인 또는 시적 화자는 "바싹 마른 채 열반하는" 대추나무의 죽음을 꿈꾸는 것이다.
서서 죽는 나무
김광규
오래 가문 날씨 탓인가 여름내 대추나무 가지에 꽃피지 않고 열매 맺지 않더니 가을 되어 갑자기 새순이 돋아났다 낯선 이파리들 노랗게 피어나서 겨울에도 잎이지지 않았다 (저것이 바로 나무의 암이라고 정원사는 진단했다) 머리도 없이 내장도 없이 몸 밖으로 암세포를 길러내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서서 죽는 나무 뿌리가 없어 쓰러져 가는 무리들 썩도록 남겨놓고 혼자서 바싹 마른 채 열반하는가
- 출전: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문학과지성사, 1998)
▶ 김광규 시인 약력
시인.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 졸업. 1975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4), 『크낙산의 마음』(1986), 『좀팽이처럼』(1988), 『아니리』(1994), 『물길』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문학상> <편운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 독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