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시단에 데뷔한 김선우 시인은 구체적인 이미지의 육화(肉化)를 통해 여성성의 문제를 환기하는 시인입니다. 특히 「어라연」과 같은 시에서 보여준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시적 성찰은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사랑의 상처」 역시 "텅 빈 집"이 되어야만 사랑이 머무를 수 있다는 특유의 시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랑이란 반드시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까? 오로지 자기만이 그 사랑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사랑의 거처
김선우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 김선우 시인 약력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마쳤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의 시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으며, 첫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 및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2002)를 펴냈다.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