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고향에 가 묻히던 날은 비가 내렸다 파헤쳐진 붉은 흙이 빗물에 흘러내리는 산비알 차일 속에서 아낙들은 국을 푸며 찔끔댔다 젊은 남편의 무능과 용렬을 탄식하면서. 그날도 비가 왔다 철없는 짓거리에 대들기도 부끄러워 스스로 자술서에 도장을 찍고 아무렇게나 유치장 마루에 널브러지던 도시의 소음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던 밤도. 비가 내렸다 그녀와 헤어지던 그 가을 무력한 내 손에 꽂히던 연민과 경멸의 눈빛 머리칼이 젖고 목덜미가 젖고 나뭇잎이 젖고 우리들 오랜 떨림과 기쁨이 젖고. 그가 죽던 날도 비가 내렸다 두려워서 너무 두려워서 잊어버리자고 그를 잊어버리자고 멀리 도망가 숨어서 울던 날 그의 말을 잊어버리자며 얼굴을 잊어버리자며.
그날도 비가 오리라 내가 세상을 뜨는 날 벗어놓고 갈 헌 옷과 신발을 허위와 나태의 누더기를 차고 모진 빗줄기로 매질하면서
- 출전: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2002) 중에서
▶ 신경림 시인 약력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장시집 『남한강』, 산문집 『시인을 찾아서』, 『바람의 풍경』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