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학에 갓 입학해 곽재구의 시 「김득구」를 처음 접하는 순간, 나는 숨이 막혀 전율하는 듯했다. 김득구는 내 사춘기의 뜨거운 '상처'였기 때문이다.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꿋꿋하게 싸웠지만 14라운드에 맨시니의 일격을 맞고 비명에 갔던 비운(悲運)의 복서 김득구(1955-1982). 나흘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던 김득구 선수가 끝내 숨을 거두는 순간, 중학생이었던 나는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가슴이 아팠고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세상은 '김득구'란 존재를 까맣게 잊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접한 곽재구의 시 「김득구」는 1980년 광주의 아픔과 묘하게 맞물리며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의 서러움과 그의 무서운 투혼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김득구 사후 2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챔피언>이 곧 개봉된다. 그러나 곽재구 시인의 조시(弔詩)를 통해 '서러운 위로'를 받았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 <챔피언>이 '헝그리 정신' 운운하며 <분노의 주먹>류의 '계몽'에 빠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의 또 다른 진면목을 보여주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그때 게임의 법칙에 따라 싸운 죄 때문에 '살인 복서'의 오명을 뒤집어쓴 맨시니에게도 위로를…! / 고영직
곽재구
외로운 네가 허공을 향해 조선낫을 휘두를 때 흰옷 입은 우리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사랑과 집념을 위해 아니 그보다는 한 맺힌 네 슬픔과 기다림의 절정을 위해 너는 낯선 땅 힘센 미국 선수의 빛나는 부와 프론티어 정신 앞에 덜그럭거리는 조선맷돌 하나의 힘으로 네 슬픔의 마지막 절정 위에 큰칼을 씌웠다 돈이 많은 나라 자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사랑과 포탄을 쓰는 나라 우리들은 오늘 그 나라 대통령이 원하는 레바논 전쟁에 우리들의 꿈을 팔 것인가 생각하고 아침 저녁 TV는 우리들의 희망 위에 또 한겹 두터운 포장지를 씌우겠지만 너는 부서질 줄을 알고 너는 너의 슬픔의 한없는 깊이를 알고 너는 너의 사랑의 겸허한 목소리를 알고 너를 기다리는 사립문 위 어머니의 오랜 박꽃까지 알면서도 덜그럭거리는 조선맷돌 디딜방아 한 방으로 이 낯선 힘센 나라의 콘크리트 벼랑 위에 부딪쳐 쓰러지는구나 사랑이 많은 나라 그리움이 깊어 속살 푸른 가을하늘의 나라 득구, 너의 고향 북한강에 지금은 늦가을의 골안개 희게 흩어지고 네가 싸운 미국땅 부러우면서도 아무런 부러움도 남길 것 없는 타인의 땅을 생각하며 우리들이 세워야 할 힘센 사랑과 희망의 푸른 그날을 위해 오늘 네 쓰러진 머리 힘빠진 목줄기에 네 어린 날 검정고무신짝으로 네 고향 북한강 푸르디푸른 그리움의 강물을 쏟는다.
- 출전: 시집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1983
▷ 곽재구 시인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 당선, 문단 데뷔. 시집으로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참 맑은 물살』 등이 있음. 이밖에 기행 산문집 『내가 살아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창작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