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李盛夫, 1942∼ )
1942년 광주 출생. 1959년 광주고 재학 시절 <전남일보> 신춘문예, 1961년 <현대문학>에 추천,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경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상,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시집 『이성부 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7), 『평야』(1982), 『빈 산 뒤에 두고』(1989), 『야간 산행』(1996), 『지리산』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