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은 미뤄둔 사랑이다.
백에 하나라도 혹시 몰라서 밑바닥에 깔아 둔 명주 짜투리이다.
흰 말 타고 오려나 오늘쯤 그대는
멀쩡한 하늘 아래, 칼빛처럼 번뜩이는
흰색은 예감이다.
이젠 끝났다. 다시 시작
흰색은 낯선 출발이다.
찬서리 낮게 깔린 새벽의 고요
뿌연 길 걸어서 가출하는 마음이다.
흰색은 가난이다.
이른 봄 엎드려서 쑥을 캐는, 엎드려 밭두렁에 쑥을 캐는
온 들판에 널부러진 우리들의 입성이다.
흰색은 절망이다.
'이제는 여기 아무것도 없음' 손을 저어 보내는
흰색은 거절이다.
어제 같고 그제 같은 나날, 지치도록 바라보면
흰색은 순종이다.
외로운 탐색도 끝난 좌정.
수 천 수 만으로 떨어지는 나비떼
흰색은 황홀한 어지럼증이다.
물가루 안개비는 치근거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뜨고 사는 눈이여,
흰색은 무심이다.
아니다, 아니다, 흰색은 무지다.
비어 있음으로 눈물나는 순결이다.
함박눈 쏟아지는 고향 언덕엔
겨울 바람 펄럭이던 흰 치마자락.
불을 켜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깃발이다.
흰색은 초월, 초월하는 슬픔
하얗게 목을 늘여 투항하고 싶은 오후 세시 바닷가
미칠듯한 적막이다 흰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