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를 배경으로 한 수첩 - 김규린1아침이면 삶 속에서 삐쳐나온 실밥들이 유난히 커보인다 안개보다 먼저 일어나 하루치의 절망을 가늠하는 긴 손가락 끝에 계절이 고인다 참아온 가슴 끝에 물빛 든다 나는 물빛 검은 꽃을 채운다 2 나만 빠진 모종의 윤색된 잔치 속에 우표처럼 너덜너덜 떨어지지 않는 운명아 날 규정지으려 하지 마라 급류에 찢겨 흐르는 어린 낙엽처럼 헝클어진 채 물살 벗어나 있으리 3 꽃이되 꽃이 아니며 꽃 아니되 꽃인 것 무수히 가시에 찔린 추억 속에 억새가 부른 계절이 머물곤 한다 나, 억새에게서 벼랑에 서는 법을 배웠다 이 작은 방책을 얻기까지 고스란히 바친 반생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