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를 걷다 - 박정원 신던 구두를 힘껏 차본다 오선지에 걸린 콩나물대가리처럼 콘크리트 계단에 처박히는 발자국들 내가 팔아치운 피아노의 발자국이다 그것은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내 그림자의 음계 제법 아름다운 소리와 빛깔로 나답게 위장하던 발자국이다 지은 죄도 모르고 죄를 수긍한 죄인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담벼락 저쪽에 웅크린 내 우울의 시발점, 여덟 개의 계단 중 늘 한가운데를 찾으려했으나 빈 운동장에서 환청으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흰건반과 검은 건반들 사이를 폴짝폴짝 오르내리며 뜯는 내 발자국들이 찍힌 계이름들 허공으로 흩어진 멜로디마다 단모음의 소리눈물을 쏟아내며 검은 건반으로 다시 내려와 앉는다 이런 날은 비라도 내려야 제격이지 간간이 바람도 불고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면 더 좋고 바나마가라사다 사라가마나바다 우우우우, 샤프나 플랫을 업은 검은 건반이 저들만의 기호로 허밍한다 피아노의 페달은 진즉 닫혀있다 방울방울 눈물 떨어지는 소리만 빗방울소리를 낸다 건반 뚜껑을 열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계단에 올려 진 구두 한 짝이 통점으로 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