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느날 가출하리
새벽은 숨죽여 소신공양하는 늙은 비구처럼 고요하고
여든 살 치매 앓던 내 아버지같이 마른 통북어같이
아무도 모르게 집 나가리 잠적하리
흉가처럼
먼 옛날부터 오래 비워둔 기억세포에 가서 놀리
때 이른 황사바람을 헌 목도리처럼 두른 개자리꽃이
삭발한 맨머리로 숨어서 떨던
동학사 오르는 초봄의 추운 길이나
말없이 서로 마음 바꾸어 앉은 채
나머지 취기마저 깨기를 기다리던
국립묘지 앞 텅 빈 주차장에서
내 한나절을 놀리 다시 넋 빼놓고 그대 설움과 정신 없이 놀리
아니다, 색깔 몇 벌씩 누렇게 벗은
열한 칸 흑백사진 속 생가에 들러
길로 자란 그리움을 베어서 엮은
망각이 바삭바삭하는 그대의 묵은 편지를 다시 펴서 읽으리
죽음 위에 걸터앉아 애를 낳는
협착한 자궁에서 난산으로 늑장부리는 흐린 희망들을 낳는
산통중인 별들을 산국 끓이는 홀아비처럼 바라보리
그 무렵 그대와 나 목숨의 왕겨더미 속에서 속으로 끊임없이 타드는 뜨거운 겻불이었으니
그 불 속에 묻어둔
식을 대로 식은 운명의 태반 되찾아 태우리
문 닫힌
다시는 영영 문 열고 나오지 못하는
십여 개 중대 시간들이 원천봉쇄한
현재 쪽, 소란스런 정문 밖에는
단벌의 뒷모습만 걸어두리
내 몸만 수척한 등롱처럼 부재중을 밝혀 걸어두리
그리고는
정신은 어느날 가출하여 흉가처럼 텅 빈 그 옛날 기억세포에 가서 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