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암호들이 하얀 종이 위에서 난수표처럼 숨어 있다가 나를 보더니 일제히 늘어서 꿈틀거린다 펄떡펄떡 숨을 쉬며 튀어나오는 싱싱한 언어의 조각들이 비밀리에 미로를 만들며 똬리를 틀었다 이 귀퉁이 저 귀퉁이 퍼즐 게임하듯 맞춰본다 참으로 신기하게 딱 들어맞는다. 오늘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목적도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되어 낯선 마을을 여행하기로 했다
아마 내가 첫 여행지에서 만났던 것은 포세이돈이었을 것이다 푸른 파도 속으로 내 몸을 던졌던 기억 다음으로 헤파이토스를 만난 것 같다 그는 나에게 성냥을 건네주며 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비너스와 바카스의 유혹을 받았었나, 이후 나는 크로노스에 이끌려 하인처럼 끌려서 여기까지 왔다 가끔은 작은 배 한 척으로 강물에 몸을 싣고 바다로 나가 갈매기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보기도 하고 대리인을 내세워 로맨스와 불륜 속에서 갈등을 겪은 적 있다 그리고 천일의 밤마다 풀어주는 이야기 속에서 요술램프의 주술로 되살아나 숲 속을 걸어 보기도 한다
기울어진 햇살 사이로 금빛으로 도금된 언어들이 마구 떨어진다 지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만물의 살갗을 파고 뚫고 가르는 바이러스성 습관 나에게도 그런 DNA가 존재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