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 너덜 떨어져 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장章들이 우수수, 뜯겨져 나간다 숨진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손바닥으로 받아 들고 들여다 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뭍은 바람속으로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