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분토론 유감 - 정한용
달포 내내 한기가 뼛골을 사무치며
우역(牛疫)이 수그러들지 않고 물가까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역병 원인과 물가 대책을 두고
공중파 TV 합동 좌담회에 당대 최고의 입담꾼들이 나와
잡담을 펼쳤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좌장인 허균 선생이었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나,
‘도문대작(屠門大爵)’이라 벼슬아치들은 그 귀함을 모르고
아무데서나 입맛을 쩍쩍 다시고,
정작 역병에는 모두 나 몰라라 하는 게 작금의 사태가 아닙니까.
장관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할 겝니다.
소론 출신의 심익운 선생이 거들었다.
지금 저마다 이익과 욕망을 좇는 것이
귀신이 사람을 잡아가는 것보다 심한 지경에 이르렀지요.
뒤 도둑이 앞 도둑의 머리를 베었다는데
함께 죽기를 기약한 자들도 모두 배반하는 것이
무지렁이 도둑보다 못하다 할 밖에요.
연경에서 갓 돌아온 박지원 선생이 말을 이었다.
두 어른께서 오늘에야 제 목소리를 내시는군요.
근래 물가가 너무 올라 주부들이 장보기가 무서울 지경이라 합니다.
문 앞에는 빚쟁이가 기러기 떼처럼 서 있고
집 앞에선 술꾼들이 물고기 꿰미처럼 잠잔다 하지요
비굴하게 허물까지 벗고 몸뚱어리 다 보여도 힘든 때입니다.
이덕무 선생이 탄식을 하며 말을 받았다.
근자에 살림살이가 곤궁해졌다 하나, 저와 같겠습니까.
집안에 값나가는 것이라야 겨우 집안 대대로 내려온 고서 몇 권
20만원에 팔아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돈이 좀 남길래 술을 받고 유득공이를 불러 한잔 했지요.
‘제민구휼(齊民救恤)’이라는 게 다 뭡니까.
가장 나이 어린 이옥 선생이 덧붙였다.
시정 돌아가는 꼴이야 제가 잘 알지요.
죄 없이 목을 내놓은 소 돼지의 울음이 산천초목을 찢고
그 핏물이 강을 적셔 붉은 파도가 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젊은이들은 구직원서를 들고 승냥이처럼 뛰어다니고
독거노인들은 판잣집 냉골에 등골을 빨리고 있어요.
세 시간짜리 토론은 백분으로 편집되어
지난 일요일 밤 10시에 특집으로 방영될 예정이었다.
허나, 출연자들이 모두 문체반정에 걸린 작자들인데다
내용이 지나치게 저속하고 사회기강에 적이 위해가 될까 심려되어
결국 불방이 되고 말았다.